한줄 詩

속눈썹의 효능 - 이은규

마루안 2016. 8. 8. 08:20



속눈썹의 효능 - 이은규



때로 헤어진 줄 모르고 헤어지는 것들이 있다


가는 봄과
당신이라는 호칭
가슴을 여미던 단추 그리고 속눈썹 같은 것들


돌려받은 책장 사이에서 만난, 속눈썹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찌른다는 것
건네준 사람의 것일까, 아니면 건네받은 사람
온 곳을 모르므로 누구에게도 갈 수 없는 마음일 때
깜박임의 습관을 잊고 초승달로 누운


지난봄을 펼치면 주문 같은 단어에 밑줄이 있고
이미 증오인 새봄을 펼쳐도 속눈썹 하나 누워 있을 뿐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출처 모를 기억만 떠나는 방법을 잊었다


아지랑이의 착란을 걷다
눈에 든 꽃가루를 호- 하고 불어주던 당신의 입김
후두둑, 떨어지던 단추 그리고 한 잎의 속눈썹
언제 헤어진 줄 모르는 것들에게는 수소문이 없다
벌써 늦게 알았거나 이미 일찍 몰랐으므로
혼자의 꽃놀이에 다래끼를 얻어온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것은 온다는 역설처럼 당신의 입김 없이도 봄날은 간다


화농의 봄, 다래끼
주문의 말 없이 스스로 주문인 마음으로
한 잎의 기억을
당신 이마와 닮은 돌멩이 사이에 숨겨놓고 오는 밤
책장을 펼치면 속눈썹 하나 다시 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거라 믿는, 꽃달



*시집, 다정한 호칭, 문학동네








모란을 헛딛다 - 이은규



언젠가
얇은 담요 사이로 그녀의 맨발을 본 적 있다
기어이 가는 봄날의 꽃잎처럼
살에 감기는 바람결에도 색을 잃을까, 야위어갈까
애를 태우던 그녀의 살빛


살이라는 말처럼 연한 발음이 있을까
또 발이라는 시린 말은 어떻고


이국의 풍속사에 모란꽃 아래서의 죽음이야 말로 도도한 풍류라는 기록이 있다
그날의 풍류는 가는 발목에 혀의 문장을 새겨넣은 일
꽃의 씨방처럼 부풀어오른 건 그녀였을까
그녀라는 방향으로 흐르던 바람이었을까


지나간 걸음걸이를 추억한다
또옥 똑, 봄의 운율로 걷던
그녀는 살아서 나비의 후생이기도 했을 것
종종 바람에 체한 나비처럼, 헛딛는 때가 있어
그 모란 줄기 같던 발목을 삐끗하기도 했던 그녀
호- 하고 빚어낸 숨결을 불어넣어
부기(浮氣)를 다독여주곤 했었다


마침의 말에서까지 탐미를 반성하지 않은 그녀
비단 습신에 모란 무늬를 수놓아 신겨달라


비단에 핀 모란이 얼마나 색스럽다 한들 그녀의 시린 발은 어쩔 수 없겠다
모란 향이 눈에 밟혀 발을 헛디디면 어쩌나 애면글면하는 날들의 이력
발음되지 못한 문장들은 바람의 습기가 될 것
습신의 끈이 봄꿈처럼 스르르 풀린다 해도
고쳐 매줄 수 없는 길에 서 있을 그녀


돌아오는 길을 지우며 걷는 걸음의 배후는
피는 법을 잊은 꽃의 배후처럼, 허공이 알맞을 것





# 여러번 읽었으나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이 생긴다. 나는 위 두 시를 이 시집에 실린 시편들에서 대표작으로 본다. 진짜 좋은 시다. 이은규 시인은 흠 잡을 곳 없을 정도로 매끈하게 시를 쓴다. 숨겨 두고 아껴 가면서 오래 읽고 싶은 시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치명적인 상처 - 박남준  (0) 2016.08.11
달의 뒤쪽 - 김명인  (0) 2016.08.08
오래된 취미 - 이현호  (0) 2016.08.08
용대리에서 보낸 가을 - 이상국  (0) 2016.08.07
항문(肛門)에 대하여 - 최희철  (0) 2016.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