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비의 항로 - 허연

마루안 2016. 8. 6. 00:13



나비의 항로 - 허연



기억처럼 더러운 것은 없다
사막까지 따라오는.


아주 먼 길을 왔다.


언젠가는 바다 밑이었다는 북구의 항구도시를 떠나
살 만큼 산 나비처럼
기류에 떨다
밀리고 밀려서 남쪽으로 왔다.


사막,
쓰고 말한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는 곳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는 기적이
하루 종일 일어난다는


생전 처음 듣는 모래 바람 소리는
자꾸만 기억을 불렀다.


혼자서 먼 길을 왔다.


사막에만 산다는 포아풀 더미와 섞여
기억이 따라서 굴러 왔다.


저항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이 낯선 모래 무덤 위에도
그놈의 소금기, 소금기가 묻어 있다.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지층의 황혼 - 허연



어느 날 떠나왔던 길에서 너무 멀리 왔다는 걸 깨달을 때. 모든 게 아득해 보일 때가 있다. 이럴 때 삶은 참혹하게 물이 빠져 버린 댐 가장자리 붉은 지층이다.

 

도저히 기억되지 않으리라 믿었던 것들이 한눈에 드러나는 그 아득함. 한때는 뿌리였다가, 한때는 뼈였다가, 또 한때는 흙이었다가 이제는 지층이 되어 버린 것들. 그것들이 모두 아득하다

 

예쁘장한 계단 어디에선가 사랑을 부풀리기도 했고, 사랑이 떠나면 체머리를 흔들기도 했다. 그래도 돌아온다고 믿었던 사랑은 없었다. 떠나면 그뿐, 사랑은 늘 황혼처럼 멀었다.

 

병든 것들은 늘 그랬다. 쉽게 칼날 같았고 쉽게 울었고 쉽게 무너졌다. 이미 병들었는데 또 무엇이 아팠을까. 병든 것들은 죽고 다시 오지 않았다. 병든 것들은 차오르는 물속에서 죽음 이외에 또 무엇을 알았을까. 다시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마른 날. 떠나온 길들이 아득했던 날 만난 붉은 지층. 왜 나는 떠나 버린 것들이 모두 지층이 된다는 걸 몰랐을까.






# 한두 편만 읽어보면 누구의 시인 줄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허연 시인의 시는 문체와 호흡이 독특하다. 자기만의 색깔을 확실하게 갖고 있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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