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백일홍처럼 오래오래 - 이운진

마루안 2016. 8. 5. 23:54

 

 

백일홍처럼 오래오래 - 이운진


삼백 년 된 백일홍나무가 꽃을 피우는 일은 그저
삼백 년쯤 된 습관이겠거니
짐작했겠지만
꽃을 만드느라 뒤채던 밤이 삼백 년이라면
그 잠은 얼마나 곤할 것인가
이를테면 지금도
삼백 년 전 첫 꽃을 맺었을 때처럼
혹은 방금 햇살을 베어 물고 날아와 앉은 새의 발목처럼
착하지도 죄를 짓지도 못한 채
당신이 내 등줄기를 짚어주던 그 밤처럼
놓지 못한 바람이 보인다면
삼백 년째 백 일 동안
꽃은 얼마나 두근거렸을 것인가

나는 그 꽃 아래서
겨우 서른 몇 날의 그리움을 걱정하였으니
백일홍나무의 몸속에 잠든
삼백 년 된 별을 어찌 알아볼 수 있겠는가
무슨 힘으로 마음을 피우고 지우며 또 피우겠는가

백일홍처럼 오래오래


*시집,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천년의시작

 

 





세월 - 이운진


스무 살이 되자 열두 살의 어둠은 여명처럼 되었고
마흔다섯이 되자 청춘의 슬픔은 이슬이 되어 있었다

지나가고 지나간다

내 가슴을 찢어 놓은 어떤 바다, 어떤 구름, 어떤 노래, 어떤 미소도
먼 바다 흰 구름
가벼운 한숨과
바람이 되듯

빗방울에 몸을 잃어 가는 돌멩이처럼
한 사람도
결국

지워지고 지워진다

해가 뜨자 달이 뜨고 별이 뜨자 해가 뜬다


 



*시인의 말

아홉 번의
눈 오는 아침, 늦은 모과 꽃과 석양속의 단풍, 그리고
북십자성.
이 긴 시간의 끝에서 나는
오래 닫아 두었던 방의 창문을 열고
바람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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