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느 대낮 스치는 생의 풍경 - 이선영

마루안 2016. 8. 2. 21:26



어느 대낮 스치는 생의 풍경 - 이선영



때로 트럭에서 떨어져내린 배추 몇포기가
아채장수로 하여금 대로를 무단횡단하는 모험을 감행하게 한다
그냥 갈 수도 있었다 고작 몇푼 안되는 것, 그렇지만 아직 멀리 온 것은 아닌데, 여전히 눈에 밟히는데
무 배추 가득 실은 소형 트럭에는 비상등이 켜져 있고
야채장수는 도로 한복판에서 잃어버린 배추를 향해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러나 그 기다림도 너무 지루하다는 듯 순식간에 배추 포기는 누군가의 차바퀴에 몸을 던진다
속도의 쾌감을 누리려 하는 이, 짓밟은 자의 심보가 어떤 맛인지를 아는 이, 아 하찮은 것이라도 좀 피해갈 줄 아는 사려 깊은 이였다면 좋았을 것을
야채장수 당신도, 기왕 작정한 거, 차라리 트럭으로 대로 한복판을 막아서는 대담함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사소한 것이라도 잃었던 것을 되찾는 데는 무릅쓰고 나서는 욕기가 필요한 것 아닐까
도로 위에 흩어진 배춧잎들
야채장수의 다리는 갈피를 잃고
이제 공중에 흩날리는 그것이,
이제 쓸모없는 깃털에 불과한 그것이,
왠지 단번에 늘어져버린 제 인생의 힘줄인 것 같다고
아스팔트 위에 혼자만 물컹하게 서서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시집,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창비








색, 그리고 계* - 이선영
 


가령 내 눈에 보이는 담장 너머 저 나무에
안타까운 그대의 얼굴같은 탐스러운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렸다고 치자
그때 나는 냉큼 손을 뻗쳐 그 얼굴을 두 손 안에 가득 쥐고 뜨겁게 입술을 부벼야 할 것인가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움켜쥐고 애써 먼 데 산을 바라보며 열정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할 것인가
그러는 사이 어느덧 그대 얼굴은 낙과처럼 볼품없이 질 테고
그러면 나는 그대로부터 고개를 돌린 이래 내가 누린 오랜 안녕을 다행스러워할 건가
꼬들꼬들 말라서 서러워진 나의 육체와 그대의 육체를 뼈가 으스러지도록 후회할 건가
욕망이란, 눈앞에선 크고 탐스럽지만
지나고 나면 시들고 늙는 육체의 전말과 닮아 있는 것일까
눈먼 욕망은 사리분별을 못하지만
늙고 시든 다음에야 무슨 영화가 있으리
마지막엔 행려병자였던 한 세기 전 신여성에게
찬란했던 젊음의 소모를 바쳐 말년을 구하라 하면
그이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욕망은 짧은 한때이지만
속죄와 참회의 날은 길고
욕망은 빛나는 한때이지만
늙고 시듦엔 해뜨는 아침과 저무는 저녁이 다 한가지이니
어느 쪽을 택하랴,
어느 쪽을 택하노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안 감독의 영화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