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습관을 생각함 - 윤제림

마루안 2016. 8. 2. 08:59



습관을 생각함 - 윤제림



친정에 다니러 온 딸과
엄마가 마루 끝에 나란히 누워
서로의 얼굴에 부채질을 한다
치우지 못한 여름 습관이다.


무슨 이야기 끝인지 한 사람이 운다
나쁜 습관이다.


오래 울진 않는다
해가 짧아졌구나, 저녁 안쳐야지
부채를 집어던지며 일어선다
엄마의 습관이다


가을이다.



*시집, 그는 걸어서 온다, 문학동네








운주사 천불 - 윤제림



소가 여물을 너무 많이 먹는다고, 소를 사온 이튿날에 소를 팔아버린 황씨 같은 사람들한테 돌부처를 만들라고 시킨 것이 잘못이었다. 손가락셈도 잘 못하는 순종이 같은 사람들한테 돌부처를 만들라고 시킨 것이 잘못이었다.


황씨는 순종이를 만들고
순종이는 황씨를 만들었다
그렇게 제 얼굴 닮은 돌덩이 하나씩을 휙딱 세워놓고는
색시까지 하나씩들 만들어 앉혔다
그 색시들 잠깐씩 배가 부르더니
황씨를 닮은 아이를 낳았다
순종이를 닮은 아이를 낳았다


땅이나 파던 사람들한테 석불을 만들라고 한 것은 잘못이었다. 그것도 천 개나 만들라고 한 것은 잘못이었다


운주사 석불은 이곳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황씨와 순종이네 식구들이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처음 가족사진을 찍는 식구들 모양으로 숨을 고르며
허리를 곧추세우는, 그런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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