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의 반달 - 한승엽

마루안 2016. 8. 2. 23:31



나의 반달 - 한승엽



손톱 밑살을 뚫고 펼쳐진 붉은 길 위에
여리고 투명한 반달이 떠 있다
마침내 정중동(靜中動)을 다 채우지 못한 미궁을 본다
멀리 기억을 폐기당한 스프링 별들이
보이지 않을 즈음에 가시처럼 돋아나는
아스라한 손톱의 핏자국들,
오래전 느닷없이 인간의 뿌리에 상처가 생겼어도
기다란 손톱을 지니고 싶은
반달의 저 곡진한 이데올로기
비록 몸 밖으로 밀고 나오는
광물성의 마지막 그리움일지라도
그 그리운 것들이 더 많아져 차오르면
검은 눈이 흥건해져
오히려 환하고 아득해진다는 것을
아주 먼 오름 위에서도 세상의 반달은 안다


따스한 농담처럼, 나의 반달은 안다.



*시집, 몰입의 서쪽, 문학의전당








바람의 근황 - 한승엽



열꽃이 피고 질 무렵
신기하게도 정갈한 식욕이 손에 들여져 있다
홀연히 붉은 지문이다
정수리에 쌓였던 회색 하늘을 밀어내는 사이
한 무더기의 물살이 미간으로 밀고 들어온다
순간 주름 펴지듯 환해지는 것이 있어서
눈 뜨고 있음이
밤새 꺼지지 않을 듯 외등 몇 점 켜져 있고
덧없는 그늘 속에서 수천 개의 입이
눈썹을 달고 다시 새파란 잎으로 태어나
성장하고 마르고 아무런 말을 남기지 않을 때까지
지상의 혈관으로 펌프질을 뿜어 올릴
저 시큰한 리얼리즘의 혀,
땅끝 오지마을에서 기신기신 찾아들어 왔던 것일까
감추었던 오그린 발을 허락하며
혼잣말처럼 오늘을 무던히 걷고 있다
탁해지거나 뿔뿔이 흩어져도
늑골을 후벼 파는 숨은 발진으로
성한 몸이 아리듯 근질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