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람의 딸 - 김사이

마루안 2016. 8. 1. 20:26



바람의 딸 - 김사이



어느 날 학교 파하고 돌아오니
안방에 아버지를 닮은 낯선 할머니가 앉아 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친할머니라 한다
등허리로부터 소름꽃이 토도독 피어오르고
놀라 엄마, 엄마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평온한 시간이 지루했던 모양이다
푸른 태양이 숨어버리고
그렇게 할머니와 이상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칼바람보다 더 냉랭한 말투
쳐다보는 눈빛은 얼마나 매서웠던지
엄마가 늘 쓰는 욕에도 단련되지 못했거늘
할머니는 욕에 가시를 박았는지
들을 때마다 가슴이 쩍쩍 갈라지는 것이다
잡년 개 같은 년 씨알머리 읎는 년아
왜 그랬을까 모를 일이었다
아랫집 할머니처럼 우리 강아지 우리 강아지 하며
보듬어주길 바란 적 없는데
부지깽이 들고 쫓아다니는 것이 화풀이란 것쯤 안다
아버지는 소나기처럼 한번씩 들이쳤다 가고
어머니의 외출은 기약이 없어졌다
치통보다 곤혹스러운 시간이 흐른 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한동안 불편하고 따가웠던 바람의 정체에 대해,
어머니가 처와 자식 딸린 남자를 사랑한 것을
내가 바람의 딸인 것을 이해하는 순간
몸 깊은 곳으로부터 꽃망울이 터졌다
첫 생리였다



*시집, 반성하다 그만둔 날, 실천문학사








애첩의 품에서 - 김사이



아버지가 아프다고 해서
고향집에 가봤더니 멀쩡하기만 하다
암이 찾아왔다는 말을 어머니가 들려줄 때
아버지는 돌아앉아 담배를 태운다
칠순을 넘기고도 무슨 미련이 남았다는 듯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쉰다


아버지의 바람기로 태어난 나는
젊은 아버지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다만 포마드 냄새가 진해지면 아는 것이다
아버지가 외출한다는 것을
바람 같던 아버지 바람피우는 아버지
머물렀다 흩어지고 사라졌다 돌아오는


오랜만에 뒤적이는 낡은 사진첩
이십대에 극단 공연을 마치고 찍은 사진이란다
잿빛 줄무의 양복을 입고 각을 잡고 선 폼이
그야말로 여자들 꽤나 후렸겠다
그 중 한 여자가 지금 병수발을 한다


항암제 맞으면서 머리카락 홀랑 빠지고 나니
가발 찾는 아버지가 참으로 천연덕스럽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묏자리까지 만들어놓고
애첩의 품에서 눈을 감을 아버지
행복하세요?





# 슬픈 가족사를 처절하면서 아름답게 표현한 시다. 어느 가족이든지 숨기고 싶은 사연 한두 개씩은 있는 법, 이것 또한 좋은 시인이 되는 배경이 될 수 있었으리라. 나 또한 여기에 뒤지지 않은 아픈 가족사가 있으니,, 이런 시가 가슴 시리게 다가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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