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오래된 시계 - 임성용

마루안 2016. 8. 1. 02:13



오래된 시계 - 임성용



서울 간 누님이 커다란 벽시계를 사온 것은
하마 삼십 년 전이었다
내 어릴 적 설날, 누님은 이쁜 옷을 입고 집에 내려와
가족 사진이 걸린 옷방 봉창벽에 시계를 걸어 놓았다
태엽을 감고 솔방울만 한 추를 흔들면
집 뒤안 대숲에 해가 뜨고 감나무 잎새에 별이 질 때가지
시간이 가고 낭랑한 괘종이 울렸다
누님은 시내버스 안내양, 오라이 스톱 오라이 스톱
몸을 뒤척이며 잠꼬대를 하기도 했다
나는 낡은 벽시계를 볼 때마다 누님의 잠꼬대가 생각나
가족사진 안에서 울고 있는 열아홉 누님의 얼굴을 본다
설 명절만 되면 늙은 어머니는 고장난 시계를 고칠 수 없겠냐며
그 오래된 벽시계를 정성스레 닦는다
긴 그믐밤 무채를 썰다 자꾸만 자꾸만 손등을 벤다



*시집, 하늘공장, 삶이 보이는 창








문 밖의 시간 - 임성용



추락하기 직전의 태양이며
부족한 수면을 방해하는 온갖 소음이며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 화난 얼굴이며
능글맞은 웃음,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재산을 넘보려고
기웃거리는 길게 찢어진 눈 흰자위
간신히 그들의 추격을 피해 거리를 나서자마자
짐승의 내장을 쏟아내고 가는 더러운 화물차며
핏덩이 깔린 아스팔트의 페인트 자국이며
충돌 직전의 사람들, 악의에 가득 찬 주먹과 주먹들
무언가 흉계를 꾸미고 있는 근엄한 건물들
그들의 커튼과 창문이 나를 겨누며 열리기 전에
나는 엉겁결에 문을 걸어 잠갔다
스위치를 내리듯 눈과 귀와 입을 닫았다
시간은 정오를 한참 지나고, 백짓장처럼
허연 하늘은 흐려질 기색이 전혀 없다
시시각각 터질 듯한 잠은 부풀어 오르고, 나는
이 한낮의 불면에서 도무지 깨어날 시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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