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회복기의 노래 - 박성준

마루안 2016. 8. 1. 18:56



회복기의 노래 - 박성준



이제는 괴롭지 않다
나는 여전히 더러운 것을 아름답다 치장할 용기가 없으나
다시 타오르는 대지의 울렁거림과 태양의 비스듬한 고해, 산중의 바위들이 불어대는 입김들을 예감할 수 있으니
조용한 그날의 봄과 나는 오래 싸우고 있는 중이다


세상 어디에도 죽어서 집을 짓는 자유는 없고
어디로 갈 것인가, 물음을 청하는 백골은 없다


*


누이야
어떤 날은 아비의 형이라는 기운이 찾아와서 굶주림을 주고 가고 온몸에 가려움만 놓고 사라진다 다른 날은 그 형의 배다른 당숙이란 분이 나타나서 온종일 제 말 좀 들어달라고 울다 간다
할애비는 내 정수리를 밟고 서서 종종 깨끔질을 하고, 편두통을 주고, 내 애인의 조상이란 분이 찾아 와서는 다락에 자물쇠 좀 풀어주라 휘리릭, 휘리릭 풀어달라고 꼬라지를 내고 간다
슬퍼 목 놓아 웃어버리자니 나라는 것이 꼭 이런 날 뿐인가 하여 이런 날 뿐인가 하고, 여간해서 웃음이 오르지 못하고, 이 생의 없는 기운들과 싸우다가, 나는 뒤도 없이 나를 떠나고만 싶었다
누이야 안부를 전해오지 않는 누이야, 보라


저물수록 저 혼자서 가는 강물과 현실을 멸시하며 웃는 친절과 허름한 옛집에서 술 한 독을 내오는 질투만이 있을 뿐
나는 전혀 아프지 않다


*


지난날의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홀로 책을 읽다가, 몇 줄만 책을 읽다가, 그 책을 꼭 껴안고 한 반만년만 잠이 들어도 좋을 먼 곳에서 나는 눈을 떴다 다른 곳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음절들
나는 숨을 쉬기 위해서 술을 마셨다
나는 나를 공격했다


이곳의 모순과 이곳의 이해가 잠깐은 궁금한 순간이 찾아왔다 모르는 내가 몽유 속으로 찾아온대도 반갑지 않았다
나는 나를 간신히 그리워할 줄 아는 영혼이었고 피가 돌지 못하는 봄이었다


누군가는 나를 찾아와 주겠지?
오들오들 내일에 굶주렸다 일어나보면 노랗게 젖어 있는 베개의 얼룩과 구겨진 이불보가 고작 여기서 나를 부활시킨 전부였다 곧이어 빛과 파도와 대지의 고운 향기가 나의 삶을 제압했다
때때로 육체의 찬란함 속에서 쉬이 매혹당하여 새삼스레 노래를 느낄 형편도 뭣도 없이
나는 내 뛰는 육체에 설랬다


*


누이는 아직도 병과 싸우는 중이다


얼마나 더 외로운 뒷모습으로 윳동 저고리를 갈아입고, 느닷없이 꽃이 떨어지는 나무의 자리를 찾아 고이 입김이나 불어주며, 괘를 던지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자유란 무엇인가 늙음이란, 말 할 수 없음이란, 기억이란,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죽어서 괴로운 것은 귀신이요, 살아서 노래하는 것은 무당이니, 누이야
 

살아 있다는 증명이 오직 병뿐인 당신
나는 숨을 쉬기 위해서 통증을 만든다



*시집, 몰아 쓴 일기, 문학과지성








아껴 쓴 일기 - 박성준



나는 왜
열 살부터 너라는 이름의 평전을 쓰기 시작했니?


동무야, 화단 밖에는 너보다 일찍 다녀간 통증이 있단다
부르자마자 입술과 헤어지는 말이 있단다
꽃을 감싸고 있단다


저 꽃은 꽃이 아니려고 애쓰는 동안에만 꽃인데
나무야. 온갖, 젊지도 않은 모양으로 구름을 쑤시는 필체가 있단다.


어머니보다 긴 이름의 여자가 있단다.
대책 없이 모르는 날씨
누이야. 숨을 쉬기 시작했니?






# 시집의 맨 마지막 시와 첫장에 실린 시다. 하나는 아주 길고 하나는 다소 짧다. 누구나 가슴에 상처 한두 개씩은 담고 살겠지만 누이에 대한 아픔이 아련하게 전해오는 시다. 이런 걸 동병상련이라고 할까. 시 쓰는 기본기가 탄탄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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