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보급소의 노래 - 하린

마루안 2016. 7. 24. 23:49



보급소의 노래 - 하린



형은 바람보급소 사나이
365 365 리듬에 맞춰 페달을 밟는 보급대원
골목은 조간신문처럼 형을 인쇄하네
배달의 기수로 태어나
배달만 하다 훌쩍 점프한 형, 나를 때리네
그날은 대문 앞에 우유가 쌓이고 쌓이는 날
형의 동창 녀석이 이층집 넓은 창문 앞에 서서
눈꼽을 떼며 모닝커피를 마시는 날
집주인들이 씨유투게더 씨유투게더 지껄이고
보급소장이 형의 귓불을 심하게 잡아당긴 날
형의 주먹에선 바람 냄새가 나네
씨팔 씨팔 씩씩거리는 바람의 시장기
특수효과로 비까지 쏟아지고
세상에 잘못 배달한 정자 두 마리가
가난의 소유권을 나누고 있네


아버지가 무덤을 열고 나오면
형은 아버지를 두들겨패줄 거라 말하네
낡은 자전거는 돌아오지 않고
유통기한 지난 우유처럼 점점 나도 상해가고 있네
왜 자꾸 주먹은 슬픈 건지
가난은 왜 이리 까만 건지
담장을 뛰어넘는 바람에게 묻네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문학세계사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 하린



직구―아버지
소속팀을 또 옮겼다 군내 버스가 하루에 두 번만 들어오는 동네에서 우루과이라운드라는 새로운 규칙이 발효되자 방어율이 형편 없었던 아버지가 마지막 생산의 밭을 자르고 도시 변두리로 이적료도 없이 옮겨갔다 주물공장으로 빨려 들어간 건조한 어깨가 은퇴를 예감하게 했다 뜨거운 쇳물에 발등이 데인 후 공의 구질이 너무 단순한 게 문제였다고 실토했다 직구만을 던지던 습성은 시즌 내내 흥행 없이 끝나고 말았다 아버지의 낡은 감독은 재래식 화장실에서 똥닦이로 사라져간 윤리교과서였다


슬라이더―어머니
원래 직구를 가장 잘 구사하는 사람은 어머니다 술 취한 아버지에게 얻어맞고도 끈질기게 땅만 팠다 논과 밭에 구사하는 느리고 정직한 구질은 진딧물 탄저병 태풍에게 쉽게 홈런을 허용했다 어머니도 변두리 식당으로 소속팀을 옮겼다 뻔한 직구 대신 반찬에 미원을 쓰며 변화구를 구사했다 손님들의 혓바닥은 방망이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어머니의 구질에 속아 넘어 갔다 어머니는 한동안 집안에서 에이스로 인정받았다


포크볼―형
왼손잡이였다 형이 마운드에 들어서면 출루하는 놈들이 많았다 1군들만 모인다는 S대학교 도서관에서 철학책이나 들추다가 약삭빠른 놈에게 안타를 맞고 도루까지 허용했다 졸업도 하지 못한 채 강판당했다 형은 소속팀를 떠나 지리산과 인도에서 전지훈련을 했다 6년 동안 형이 사라진 후 '제 3의 물결'이 밀려와 새로운 구질을 가진 젊은 선수들이 주목받았다 자유자제로 움직이는 광속의 구질을 형은 구사하지 못했고 2군으로 밀려나더니 결국 면사무소 말단 직원으로 떨어졌다


커브―누나
누나는 일찌감치 포수로 돌아섰다 인기가 많은 투수를 거부한 채 마을금고의 포수가 되었다 마을금고의 감독은 자꾸 변화구를 받아 내라고 주문했다 VIP 고객들은 누나의 미끈한 다리 사이에 입금하길 원했고 누나는 승률을 위해 적당한 편법을 동원했다 야간 경기도 서슴지 않았다 누나의 실적은 높아졌고 승진하여 곧 코치가 될 거라고 했다


마구―나
나는 실업팀에 무명선수가 되었다 임시직을 반복하다 30대 중반을 넘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스카우트 제의는 없었다 정식 선수가 되는 걸 보지 못한 채 아버지가 죽던 날 승리의 기쁨인지 패배의 억울함인지 어머니만이 눈물을 흘렸다 형과 누나는 벌건 육개장 국물에 지루한 감정을 휘휘 저어 먹었다 박찬호가 던진 강속구에 맞은 BMW 차량의 수리비는 얼마나 나오는지 알아?.... 워낙 튼튼해서 하나도 안 나온대.... 난 마구를 던질 거야 꼭 BMW 차를 무너뜨릴 거야.... 형은 말이 없었다 누나는 죽음만이 은퇴를 허용한다고 주절거렸다 관중들은 건넛방 초록색 그라운드에서 야유하듯 화투장을 날렸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고 온 것이 있다 - 정진혁  (0) 2016.08.01
능소화 - 이창숙  (0) 2016.07.25
낯설지 마라 - 문동만  (0) 2016.07.24
꽃 피는 날은 떠나지 마라 - 이기철  (0) 2016.07.24
상처라는 말 - 이승희  (0) 2016.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