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두고 온 것이 있다 - 정진혁

마루안 2016. 8. 1. 01:09



두고 온 것이 있다 - 정진혁



시계도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단가에 서면
봉숭아 꽃씨 터지듯 흩어져 있다


내 황량한 마음에 꽃잎 비추는 날
다시 갈 수 없는 먼 곳에다
두고 온 것이 있다
누나는 생의 끝을 말아 쥐고 갔다
꽃잎의 문을 열고 가는 누나를
바라보기만 했던
지워지지 않는 꽃밭


매콤한 향이 눈가를 흐리게 하는
한련화 꽃잎에는 누나의 옷자락이 있다
두고 온 그녀를 꽃잎 속에서 꺼냈다
그녀의 손길과 두고 온 시간이 빼곡히 들어차 수놓은
그리움의 잎맥


뺨을 흐르며 무늬가 내게로 왔다
서러운 날에 한련화 환한 꽃잎 따 넣어
밥 비벼 주던 누나
엄마 잃은 아득한 어둠에 뒷모습이 울렁이던 누나
너무 고와 꽃밭에 두고 온
꽃잎 사이로 고이는 시간
두고 온 것을 찾아 나선 날
내 가슴 빈집 마당보다 더
흔들리고 있다



*시집, 간잽이, 세계사








시간은 사람을 먹고 자란다 - 정진혁



시간이 제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오래 입어 해진 스웨터를 걸치고
팔순이 넘은 어머니가
6시 13분에 저녁을 달게 먹었다
어머니는 늘 시간을 먹고 사는 줄 알았는데
어제 어머니는 시간의 먹잇감이 되었다
시간은 이미 귀를 먹어치웠다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은
왼쪽 발목 관절을 먹는 시간의 입가에
어머니가 먹은 시간이 질질 흘러내렸다
시간은 사람을 먹어 작아지게 한다
기억을 먹어버리고
안경 너머 짓무른 눈에는 끈끈한 침을 발라놓았다
이 빠져 흉한 사기그릇처럼
군데군데 이빨마저 먹어치웠다
시간 앞에 먹이거리로 던져진 육신
어머니는 이제 손목에 시계를 차지 않았다
오늘도 어머니는 6시 13분에 저녁을 달게 먹었다
기다렸다는 듯
시간은 어머니 오른쪽 무릎 관절에 입을 대었다
먹히던 시간이
무서운 제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래된 시계 - 임성용  (0) 2016.08.01
인연에 관하여 - 박수서  (0) 2016.08.01
능소화 - 이창숙  (0) 2016.07.25
보급소의 노래 - 하린  (0) 2016.07.24
낯설지 마라 - 문동만  (0) 2016.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