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능소화 - 이창숙

마루안 2016. 7. 25. 03:41



능소화 - 이창숙



장대비 긋는 소리 멈추고
감나뭇잎 사이 길로 능소화 핀다
해(年)를 길어 올린 느긋함이라니
빗물에도 벙긋 입을 다물지 못하고
길 쪽으로 고개 내밀어
미소진다
호젓한 길, 해 저물어 되돌아와 서면
손닿을 듯 황홍색 입술로
덩굴째 마음 뻗어 오는 것을


장대비로 분을 터뜨려도
늘 제자리에서
환한 꽃이여
나도 가벼워지면서



*시집, 바람든 무 내 마음에게, 눈빛








비, 비(悲) - 이창숙



비와 비 사이 누가 뛰어가고 있다 바람에 빗물에 꺾일 듯 대나무살 파란 비닐우산을 들고 국수틀 집 아이 내 친가가, 통 통 사라진다 유년의 길모퉁이가 나를 이끌고


처음이다 하루 종일 비에 갇혀 보던 것도 즐거운 일이란 걸 아픈 기억이 촛불을 켠다 어린 날 정자나무 밑을 흐르는 강이 보이고 나랑 같이 자란 그 강이 어느 날 일가친척들을 눈물로 흩어놓은 저수지가 된 것을


창문 너머 먼지 떠내려간 콘크리트길은 내가 보았던 저수지 속 같다 맨질맨질한 농로(農路)도 보이고 새떼 앉은 정자나무 그늘도 엎드려 있고 아버지의 깊은 한숨도 빗물에 어룽져 있다


비와 비 사이 낯설지 않은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검은 우산 속 빗물 든 하루를 끼고 국수틀 집 아이 내 친구가, 그리고 사라진다 환한 뒷모습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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