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 피는 날은 떠나지 마라 - 이기철

마루안 2016. 7. 24. 20:25



꽃 피는 날은 떠나지 마라 - 이기철



산의 핏줄로 살구꽃 피어나고 흙의 흰 피인 물 흘러간다
오늘 하루도 뿌리들이 흙을 끌어안는 힘으로 견디어 왔다
빈부에 젖은 하루가 놀빛 저녁에 닿으려면
천의 잎새처럼 생각을 길어 올려야 한다


오늘도 생각을 길어 순금을 빚는다
흩날리는 꽃잎 아래서 반가운 사람 만나면
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말로 인사하리라
그러면 그의 마음도 손수건처럼 펄럭이리라


홑옷 속에 명주의 마음 감춘 사람아
꽃 피는 날은 떠나지 마라
꽃 다 져 어두운 날
나는 혼자 지상에 남아
이 세상 가장 정결한 쓸쓸함 한 가닥 빗질하리라
들판의 꽃 어둠 속에 묻힐 때
나는 이 세상에 없는 노래 한 구절 탄주하리라



*시집,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서정시학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 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놓아 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 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정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해지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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