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리운 것들은 모두 먼 데서 - 이성부

마루안 2016. 5. 23. 23:15



그리운 것들은 모두 먼 데서 - 이성부

 

 

오늘은 기다리는 것들 모두
황사(黃砂)가 되어
우리 야윈 하늘 노랗게 물들이고
더 길어진 내 모가지,
깊이 패인 가슴을
씨름꾼 두 다리로 와서 쓰러뜨리네.


그리운 것들은 바다 건너 모두 먼 데서
알몸으로 나부끼다가
다 찢어져 뭉개진 다음에야
쓸모 없는 먼지투성이로 와서
오늘은 나를
재채기 눈물 콧물 나게 하네.


해일(海溢)이 되어 올라오면 아름다울까.
다 부숴놓고 도로 내려가는 것을
다치지 않은 살결들
깨끗한 손들만이 남아서
다시 일으켜 세우면 아름다울까.
기진맥진 누워버린 얼굴들을.



*시선집, 깨끗한 나라, 미래사

 

 





 

봄 -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미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누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세상을 이미 떠난 시인의 시를 읽는다. 산을 좋아했던 시인은 이제 없지만 시는 남아서 이렇게 가슴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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