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잡배의 사랑 - 허연
시정잡배에겐 분노가 많으니 용서도 많다.
서늘한 바위 절벽에 매달려 있는 빨갛게 녹슨 철제 계단 같은 놈들,
제대로 매달리지도,
끊어져 떨어지지도 못하는 사랑이나 하는 놈들,
사연 많은 놈들은 또 왜들 그런지.
소주 몇 병에 비오는 날 육교 밑에 주저앉는 놈들.
그렁그렁한 눈물 한 번 비추고 돌아서서 침 뱉는 놈들.
그러고도 실실 웃을 수 있는 놈들.
그들만의 깨달음이 있다.
시정잡배의 깨달음.
술국 먹다 말고 울컥 누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물가물하지만 무지 아팠다. 죽을 만큼 아팠다.
그 술국에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또 웃는다.
잊어버리는 건 쉽지만
다시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그게 시정잡배의 사랑이다.
마지막으로 십팔번 딱 한 번만 부르고 죽자.
*시집, 내가 원하는 천사, 문학과지성
얼음의 온도 - 허연
얼음을 나르는 사람들은 얼음의 온도를 잘 잊고, 대장장이는 불의 온도를 잘 잊는다. 누군가에게 몰입하는 일. 얼어붙거나 불에 타는 일. 천년을 거듭해도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
# 허연 시인은 1966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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