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 기형도

마루안 2016. 5. 12. 23:15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 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가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기억할 만한 지나침 - 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기형도 시인은 1960년 경기도 옹진 출생으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 정치부와 문화부, 편집부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1989년 3월 스물아홉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유고시집으로 <입 속의 검은 잎>이 나왔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의 속도 - 정병근  (0) 2016.05.15
꿈꾸는 죽음 - 이창숙  (0) 2016.05.15
길이 아닌 길 - 이선영  (0) 2016.05.09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0) 2016.05.09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 김재진  (0) 2016.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