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수은등 아래 벚꽃 - 황지우

마루안 2016. 5. 1. 23:49



수은등 아래 벚꽃 - 황지우

 
 

사직공원(社稷公園) 비탈길,
벚꽃이 필 때면
나는 아팠다
견디기 위해
도취했다
피안에서 이쪽으로 터져나온 꽃들이
수은등을 받고 있을 때 그 아래에선
어떤 죄악도 아름다워
아무나 붙잡고 입맞추고 싶고
깬 소주병으로 긋고 싶은 봄밤이었다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
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
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
벚꽃이 추악하게, 다 졌을 때
나는 나의 생이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다 알았다


그때는 그 살의의 빛,
그 죄마저 부럽고 그립다
이젠 나를 떠나라고 말한,
오직 축하해주고 싶은,
늦은 사랑을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서
나는 비로소
이번 생을 눈부시게 했던
벚꽃들 사이 수은등을 올려다본다



*시집, 나는 어느날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 문지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 황지우

 
나, 이번 生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괘종시계가 오후 2시를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 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괘종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 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膜(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 밸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도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괘종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 평의 삶: 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 "그래, 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