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 백인덕

마루안 2016. 4. 24. 19:31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 백인덕



쉴 새 없이 차량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학교 앞 포장마차, 식어 가는 떡볶이와 어묵을
들어가고 나오는 차량처럼 번갈아 씹으며
자정을 향한 늦은 밤, 이십여 년 전의
그때처럼 난 혼자 되뇌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몇 몇 연구실의 불빛들은 아직 살아있지만
더 환하게 불 밝힌 건 대학병원 영안실,
가지에서 막 떨어지려는 꽃잎들이
내 흉한 어깨를 비스듬히 내려 보고 있다.
병원을 다녀야만 했을 시간을, 나는
풀리지 않는 숙취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
그러므로 잘못 다녔다는 것이다. 거기
휠덜린도 있었고, 라깡과 아아, 헤겔도 있었지만
정작 내 손으로 꾸민 작은 정원은 없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이미 다 식어버린 어묵 꼬치를 간장에 찍으며
내게 정원이 있었다면 어떤 나무와 풀,
가벼운 돌 몇 개가 어떻게 놓였을지
꿈을 꾼다. 자정이 다 된 늦은 밤,
백일몽처럼 길을 찾는다. 자꾸 발길을 느리게
하는 잔바람,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이 한마디로 이제는 시를 버려야겠다.



*시집,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문학의전당








아니, 그럴 수도 - 백인덕



공강, 무임금의
오후, 저녁으로 기운 시간.
나무, 빛깔 시멘트 의자에 누워
담배, 한 모금의 독을 길게 투입하며
시집, 낙서 따위를 뒤적이는
내 중년의 가을은 얼마나
한심, 한가로운가.
놀이가 노동보다 어렵다는 걸 자꾸
걸음을 늦추게 하는 두 무릎으로 배운다.
배운다, 앞서 배운 것들을 잊기 위해
먹는다, 먼저 먹은 것들을 밀어내기 위해
사랑한다, 사랑받지 못한 삶을 흔적으로 지우기 위해
소멸한다, 그 모두와 평등해지기 위해
아니, 그럴 수도
찬양, 경멸조차 희구할 수 없는 생활이
생각, 치기보다 어렵다는 걸 한없이
겉과 속이 뒤집히는 불판, 가슴으로 배운다.
공강, 무임금의
오후, 저녁으로 이미 기운 시간.
나무, 빛깔 시멘트 의자를 떨고 일어서며
아 잊는다. 각인한다.
한가롭게 살아간다는 하루, 하루를
아니, 그럴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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