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절로 피는 꽃 - 조항록

마루안 2016. 4. 24. 20:10



절로 피는 꽃 - 조항록

 

 

겨울이 바람의 팔목을 비틀며
항복을 강요할 적
산수유가 피었다


저기 설움의 아랫녘부터
왜 꽃이 피어나는지
다시 젖 먹던 힘까지 용을 쓰는지


당신이 또 다른 당신의 고통에 무심하듯
겨울은 어쨌거나 봄을 이해하지 못할 뿐
봄은 결코 꽃을 잊는 법이 없는데


겨우 사람의 일만 살필 줄 알아
하마터면 얼어붙은 대지를 두드리며
섣부른 희망을 들먹일 뻔 했으니



*시집, 거룩한 그물, 푸른사상

 







숨쉬기는 쉬운 일인가 - 조항록



숨쉬기는 쉬운 일인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
일없이 숨쉬기라지만
중환자실에 들어가본 이는 알리라
온갖 첨단 과학의 도움으로도
숨 한 번 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하다못해 흔한 몸살감기를 앓아도
막힌 코의 답답함이 얼마나 끔찍한지


어째서 체조의 마무리는 늘 숨쉬기 운동인지
진땀을 흘리며 허벅지에 알이 박이도록 달려도
숨쉬기 운동을 하면 왜 비로서 편안해지는지
가슴에 바윗덩어리 같은 응어리가 들어차
숨이 턱턱 막혀본 이는 알리라
말하자면 여하한 목숨이라는 것들이
따지자면 쉼없이 숨을 쉰다는 것
숨을 쉼으로 서러움을 견디며 산다는 것


한 여자에게 지독한 산통을 안겨주며 태어나서도
엉덩이에 시퍼런 멍이 들도록 맞아야 운 것도
못이기는 척 꽉 막힌 숨통을 뚫어
숨을 쉬기 위한 것이었음을
쉽지 않은 날들을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아프게 다짐한 것이었음을


숨쉬기는 쉬운 일인가


잠을 자면서도 맹렬히 숨을 쉬는 일이
어찌하여 만만한 일인가





# 조항록 시인은 1967년 서울 출생으로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1992년 <문학정신>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지나가나 슬픔>, <근황>, <거룩한 그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