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겁에 질린, 취하지 못하는 - 고광헌

마루안 2016. 4. 18. 23:16



겁에 질린, 취하지 못하는 - 고광헌

 
 

술에 잘 취하지 않는 건
체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 몸이 너무 겁에 질려 살아와서 그런 것 아닐까
내가 하는 일이 큰 죄가 될 수도 있어
겁에 질린 잠의 세포가 깨어 있는 것 아닐까


정말 취해버리면
틀림없이 저지를 것 같은 광포한 일탈
숨겨온 적의
확, 싸지르고 싶던 생들이
둑을 넘어 한꺼번에 몰려올까봐 두려운 것 아닐까


정말,
주량이 크기 때문일까
운동선수 출신들이 술도 잘 먹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혹시 이런 건 아닐까
한번 터지면 도저히 그칠 수 없어
몸속 어디쯤에 숨겨둔 눈물이
쏟아질까봐 피하려는 것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그 세월에 그래도 괜찮은 놈,이라는 평판
골프공 속처럼 구겨넣은 그저그런 밑천 확, 쏟아질까봐
취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정말, 의지가 강해 취하지 않는 걸까
어느날 다가온 사랑 앞에
날 선 생을 열어주지 못한 채
무릎 꿇어버린
그 겹겹의 도피행각들이 탄로날까봐
취하지 않으려 발악하는 것 아닐까


아는 것도 모르는 척, 모르는 것도 아는 척
없으면서 있는 척, 있으면서 없는 척
척척 능청 떨어온 계절들이
마침내 거덜나는 게 드러날까봐 겁나는 것 아닐까


늘 저만 서럽고, 저만 불쌍하고, 저만 용서하며 살아온
속살이 드러날까 겁나
육신과 영혼이 취하지 않으려고
동맹을 맺고 있는 것 아닐까


그리하여
취하지 못하는 고통
취하지 못하는 영육의 항쟁이 계속되는 것 아닐까


이러다, 영원히 만취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것 아닐까
아닐까



*시집, 시간은 무겁다, 창비

 

 






가을, 도봉에 올라 - 고광헌



평생 잔정만 주다 이젠 너무 늙어버렸다

늦은 가을

관절 마디마디

환하게 불거지며 피어오른다


웃음 반 울음 반 뭉쳐 들고

내 발치 아래 달려온 것들

번듯하게 위로도 해보지 못하고

그저 큰 소리 나누어 지르고

돌려보낸 세월인데

오늘

또 한차례 흥건한 놀이판 벌이겠다니

차라리 나도 온몸 풀어놓고

어울리고 싶구나

날마다

분신하듯 타오르고 싶구나


 



고광헌 시인은 1955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경희대 체육교육과를 졸업했다. 1983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과 시 무크지 <시인>으로 등단했고 <5월시> 동인으로 활동했다. 첫 시집 <신중산층 교실에서> 이후 26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인 <시간은 무겁다>를 냈다.

 
# 농구선수 출신인 고광헌 시인은 크가 무척 크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농구선수로 스카우트 되어 대학 3학년까지 선수로 활동했으나 건강이 나빠져 코트를 떠났다. 대학을 마친 후 선일여고에서 체육교사로 재직하던 중 1985년 민중교육지에 쓴 글이 문제가 되어 학교에서 해직 되었다. 이후 문화운동 단체인 민주교육실천협의회 사무국장을 맡아 민주화운동을 했고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과 함께 신문사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문화부장, 편집부국장, 광고국장 등을 거쳤고 2008년 1월 사원들이 직접 투표를 해서 뽑는 사장 자리에 올라 한겨레신문 사장을 지냈다. 도발적인 시를 쓰는 김경미 시인과는 부부 사이로 두 사람은 1986년에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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