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디아스포라의 황혼 - 마종기

마루안 2016. 5. 3. 23:26



디아스포라의 황혼 - 마종기



내가 원했던 일은 아니지만
안녕히 계세요.
나는 이제 가겠습니다.
산다는 것은 떠나는 것이라지만
강물도 하루 종일 떠나기만 하고
물살의 혼처럼 물새 몇 마리
내 눈에 그림자를 남겨줍니다.


한평생이라는 것이
길고 지루하기만 한 것인지
덧없이 짧기만 한 것인지
가늠할 수 없는 고개까지 왔습니다.
그대를 지켜만 보며, 기다리며
나는 어느 변방에서 산 것입니까.


착하고 정직한 것만이
마지막 감동이라고 굳게 믿었던
젊고 싱싱한 날들은 멀리 가고
노을이 색을 바꾸어 졸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포옹만 믿겠습니다.
내 노래는 그대를 만나서야 드디어
벗은 몸의 황홀한 화음을 탔습니다.
주위의 풍경이 눈치 보며 소리 죽이고
감은 눈의 부드러움만 내게 남는 것이
이 나이 되어서야 새삼 눈물겹네요.



*시집, 하늘의 맨살, 문학과지성

 

 






늙은 비의 노래 - 마종기



나이 들면 사는 게 쉬워지는 줄 알았는데
찬비 내리는 낮은 하늘이 나를 적시고
한기에 떠는 나뭇잎 되어 나를 흔드네.


여기가 희미한 지평의 어디쯤일까.
사선으로 내리는 비 사방의 시야를 막고
헐벗고 젖은 속세에 말 두 마리 서서
열리지 않는 입 맞춘 채 함께 잠들려 하네.


눈치 빠른 새들은 몇 시쯤 기절에서 깨어나
시간이 지나가버린 곳으로 날아갈 것인가.
내일도 모레도 없고 늙은 비의 어깨만 보이네.


세월이 화살되어 지나갈 때 물었어야지.
빗속에 혼자 남은 내 절망이 힘들어할 때
두꺼운 밤은 내 풋잠을 진정시켜 주었고
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편안해졌다.


나중에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안개가 된 늙은 비가 두드려주었지만
아, 오늘 다시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는
빗속에 섞여 내리는 당신의 지극한 눈빛





# 종일 오락가락 하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문득 울컥 하는 것이 올라왔다. 지금까지 참 많이도 세상을 떠돌았다는 생각에서다. 디아스포라의 원래 뜻은 조상의 땅인 팔레스타인을 떠나 뿔뿔이 흩어진 유대인들이 고향을 떠나 살면서도 자신들의 종교와 관습을 잊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고국을 떠나 외국생활을 하는 이민자를 말하기도 한다. 마종기 시인은 긴 세월 외국 생활을 했기에 시에서 잘 숙성된 삶의 통찰력이 그대로 전해온다.

 
전생에 억울한 누명이라도 씌우고 도망친 운명이었을까. 밑바닥 태생에다 어쩌다 보니 고향을 잃어버린 몸이 되었다. 늙어서 떵떵거리며 호위호식할 형편은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늙고 병든 몸으로 탑골공원 모퉁이에서 물끄러미 해바라기를 하며 앉아있거나 골목길을 전전하며 빈병이나 종이박스를 주워 생활하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 고향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사는 곳이 고향이라 했다. 이 비 그치면 봄날은 어디론가 곧 떠날 채비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