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너무 긴 이별 - 강연호

마루안 2016. 4. 18. 23:08



너무 긴 이별 - 강연호


 
다시는 만나지 않기 위해 그대 만나네
거북 등짝 같은 길을 타박타박 걸어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으로 지나치고 싶네
바람 심하게 부는 날 기억의 나무 우우 흔들리면
나무 그늘 속에서 그대의 그늘을 생각할 것이네
마른 강물이 시퍼렇게 흘러가던 한 시절
담뱃불로 자근자근 청춘의 허벅지를 지지며
그대와 나 잘 놀았네 친구의 뼛가루를 뿌린 물가에서
살진 물고기 잡아먹으며 즐거웠네
새벽마다 배꼽에 고여 부글거리는 욕망의 거품들
신발 벗어 툭툭 꺼트리며 노래 불렀네
하나 그대가 그린 그림은 사막
내가 찍은 방점은 모래알
달래 냉이 씀바귀의 아이들은 시들었네
삶은 길길이 날뛰다 목 잘린 짐승 같고
갑자 을축 병인 정묘 모든 연대의 비린내 사라졌네
이제 텅 빈 장독 속으로 고래 힘줄의 고요 들어차네
가령 손금이나 우두커니 들여다보는 오후의 한때
사뿐 정수기를 통과한 무정란의 물을 마시면
음복 같은 쓸쓸함에 숨 막히네
귀밑머리와 턱선을 만져주는 햇살
그대 숨결인 듯 간지러워 자꾸 손 갈 테지만
받침이 떨어져나간 간판의 글씨처럼 허전해지네
그대와 나 팔랑팔랑 날아간 나비떼를 찾아
벼랑까지 밀려 있네, 이것이 운명이라면
다만 마지막으로 들끓는 결별의 의지
헤어질 수 있을 때 헤어지기 위해 그대 만나네

 


*시집,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문학동네

 







겨울의 빛 - 강연호



우듬지에 겨울 햇살이 이명(耳鳴)처럼 매달려 있다
초록이 없으므로 햇살은 더 이상 빛나지 않는다
나무는 제 발치께를 우두커니 내려다본다
발로 쓸어모으는 기억은 누구에게나 허전한 법이다
한때 웅숭깊었던 그늘의 넓이를 가늠하며
나무는 체온계를 문 아이처럼 생각에 잠긴다
텅 빈 고요가 압박붕대에 묶인 허리춤을 더듬는다
동그랗게 말린 이파리 몇 장이 마저 떨어져
이미 탕진한 삶을 둔탁하게 덧칠한다
저 잎들이 움켜쥔 허공조차 내 몫이 아니었구나
바람도 없는데 나무는 진저리친다
나뭇잎 대신 이명의 햇살이 떨어져 내린다
그늘이 있던 자리를 비춘다 배추 속같이 환하다
나무를 지탱하는 힘은 이제 고요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