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동백, 보이지 않는 - 김윤배

마루안 2016. 4. 17. 23:39

 

 

동백, 보이지 않는 - 김윤배


1
삼천포 봄볕 따갑다
오래된 밥집 봄 그늘 앉기에 비좁고
억센 손으로 날라오는 생고등어국 입맛 당겨놓는다
냉이와 씀바귀가 오른 식탁은 양지바르다
누군가 소주의 그리움을 갯내음 선한 눈빛으로 말한다
봄에 취한 삼천포 골목집의 늦은 점심은 혼곤하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시인은
두미도 붉은 동백이 숯불 같다며 뱃길을 재촉한다

2
첫 나들이는 붉은 동백으로 설렌다
숯불 같다던 두미도 붉은 동백은
섬을 떠나 낯선 지명을 떠도는지
드문드문 붉은 마음 남아 있을 뿐인데
툭, 하고 수평선으로 커다란 동백 한 송이 진다

꽃 진 자리 붉어 나 오래도록 돌아서지 못할 때
두미도, 남해 속으로 조용히 가라앉는다

3
동백숲에 영험하게 서 있다는 한그루 흰 동백나무는
쉬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섬의 거친 길을 타고 넘어 다다른 동백숲, 거듭 헤맨다
동백숲 사이로 붉은 해가 솟는다
동백숲이 깊은 생각에서 깨어난다
흰 동백이 이 붉은 시간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동백숲을 나와 해변으로 나선다
한참을 걷다가 뒤돌아본 동백숲,

아, 하고 나는 탄성을 지른다

그곳에 흰 동백이 안개 다발처럼 서 있는 것이다
숲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흰 동백이
숲 밖에서 보이는 것이다
후광을 거느리고 요요히 서 있는 흰 동백을
나는 보았다 말하지 않았다

4
돌 속의 여자는 이미 떠난 후여서 만날 수 없었다
차가운 볼과 차가운 입술을 가진 여자,
피가 더워져 돌 속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간 여자
그 여자로 붉은 동백은 내 가슴에서 터지는 것이다

천년에 한 겹 생긴다는 돌의 무늬결이
세미하게 움직여간다

그녀가 돌아온다는 전언일까


*시집, 바람의 등을 보았다, 창비



 



포구에서 벚꽃의 시간에 젖다 - 김윤배


포구에 바람 분다

오래된 숨소리가 파도 계단을 건너와
너의 흰 목덜미 스치는 소릴 들었고
이어서 짧은 탄성이 터졌으므로
만개한 벚꽃 그늘을 지나
수제 초콜릿은 뜨거운 몸이었다
몸은 파도가 일렁이는 시간에 빛났다
푸른 물결은 너를 놓아주지 않아서
파도의 혀끝에서 목을 젖혔다
벚꽃잎들 꽃비로 쏟아져내렸다

포구에 바람 분다

해안도로의 벚꽃은 보랏빛 입술을 굳게 닫고 있다
주황에서 자줏빛까지의 시간들을 거느리고
붉은 해가 바다를 엎지르고 있다


 

 

 

# 김윤배 시인은 1944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한국방송통신대, 고려대 교육대학원 및 인하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겨울 숲에서>, <떠돌이의 노래>, <강 깊은 당신 편지>, <굴욕은 아름답다>, <따뜻한 말 속에 욕망이 숨어 있다>, <슬프도록 비천하고 슬프도록 당당한>, <부론에서 길을 잃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바람의 등을 보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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