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반 지하에 방 한 칸 - 이미자

마루안 2016. 2. 15. 10:37



반 지하에 방 한 칸 - 이미자
-비 오는 날 그는 한길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지상에서 아홉 계단 아래
곰팡이 꽃이 피는 당신의 미궁
바람은 무시로 섀시 문을 여닫고
슬쩍슬쩍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나기도 한다
당신은 이런 날 파꽃처럼 붕붕 흔들리면서
빈지하 쪽창을 연다 그러면
창살 사이로 찡그린 햇빛은
좁은 어깨를 비집고 들이민다
대낮에도 켜져 있는 긴 형광등 아래
당신은 말 안 듣는 절반의 몸을 기울여
커피를 타고 라디로를 켜고 혼자
두꺼운 발톱을 깎는다
혼자 밥을 푸고 방을 닦고
더러 말 듣는 오른쪽 손이
말 안 듣는 왼쪽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러 가기도 한다


아랫목 불탄 장판 위에 여윈
어깨를 뉘이면 이 미궁의 천장은
하늘로 뻥 뚫리고
더러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감감히 결 고운 하늘을 바라보다가
당신은 눈을 감는다
반 지하에 방 한 칸
빗자루에 쓸리지 않는 먼지가 되어



*시집, 검은 뿔, 천년의시작








일요일에 문을 연 약국 - 이미자



매월 넷째 주 일요일, 세란약국은
열두 개의 친절한 형광등을 켜네
약국들은 사이좋게 휴일을 나눠가졌지
나는 휴일에도 아프고
고해만큼 흰 죄를 물과 함께 삼켰네
약사는 붉은 물약을 유머처럼 흔들어 보이지
유리창에 조금 물컹해진 표정이 비치고
완쾌될 수 없는 질병은
왜 낭만적일까
나는 그저
병뚜껑처럼 얼굴을 조금 비틀어 보이네
죽음은 부케 같아
향기도 나고 누군가의 등 뒤로 던져지지, 그러나
친절한 도시 어딘가 한 군데 약국은 문을 열고
조르르 진열된 약병처럼 순한 사람들이
처방전을 내고 발랄한 알약들을 받아든다네
마른 무릎이나 심장, 혹은 어두운 방광으로
낯선 손이 얹히기도 하지만
너무 심각하지 말기로 해
근사한 각혈처럼 저녁이 쏟아지면
산발한 가로수와 바람의 긴 경련 속으로
아아, 편두통의 세월 속으로
휘청이며 절룩이며 걸어갈 뿐
그래도 아직은 살 만한 저녁
아직은 참을 만한
통증들





# 이미자 시인은 1973년 부산 출생으로 1996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검은 뿔>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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