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길 끝에 닿는 사람 - 박남준

마루안 2016. 2. 14. 23:03



길 끝에 닿는 사람 - 박남준

 
 

다시 나는 먼 길을 떠난다 길은 길로 이어져서 산과 들 강, 저문 날이면 어느 곳엔들 닿지 않으랴, 젊은 꿈과 젊은 밤과 오랜 그리움이 혹여 있을지, 그곳엔들 문을 열면 밤은 더욱 자욱하고 신음소리 쓸쓸하지 않으랴만


더러는 따뜻했어, 눈발이 그치지 않듯이 내가 잊혀졌듯이, 이미 흘러온 사람, 지난 것들은 여기까지 밀려왔는지,  뒤돌아보면 절뚝거리던 발걸음만이 눈 속에 묻혀 흔적없고 문득, 나 어디에 있는가, 어쩌자고, 속절없이


누군들 길 떠나지 않으랴, 먼 길을 떠난다 흐르는 것은 흐르는 것으로 이어져서 저 바람의 허공, 갈 곳 없이 떠도는 것들도 언제인가, 닿으리라 비로소, 길 끝에 이르러 거친 숨 다하리라, 아득해지리라

 


*시집,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창작과비평


 

 





가슴에 병이 깊으면 - 박남준

 

먼 산은 언제나 길 밖의 발길로 떠돌았으므로 상여처럼 돌아가는 길가, 등뼈 깊이 봄날이 사무쳐서 어지러운데, 두 눈에 장막은 일어 몸, 휘청이는데 얼마 만인가 마당 가득 풀들은 어느새 저토록 자라났는지, 나 먼 길 떠나고 사람 손길 닿지 않으면 이내 저 풀들, 어두운 내 방 방구들에도 솟아나겠지.


풀을 뽑는다. 한 포기의 풀을 뽑는 일도 마음대로 쉽지 않아서 모질게 다져먹지 않고는 손댈 수 없다. 쇠별꽃 봄맞이꽃 꽃마리 개미자리, 서럽다. 꽃들이 피어난 것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것은 조금 크고 어떤 것은, 보기에도 안쓰러우리만큼 작고 깨알 같지만 어느 것 하나 눈물나지 않은 것 없어 이 짓이 뭐람, 이 짓이 뭐야, 한 움큼 뽑았던 풀들 놓아 버리고 주저앉아 마음 처연한데, 앞숲인지 들려오는 너 두견, 울부짖느냐 무너져내리는 새소리.



 



# 사무치게 쓸쓸함이 묻어나는 싯구가 좋아서 자주 읽는 시다. 슬픔과 외로움에 찌들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문장이 나올 수 있는가. 단숨에 읽어 내려가다 쉼표에서 한 번씩 숨을 고를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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