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막다른 길 - 박종해

마루안 2016. 2. 15. 07:39



막다른 길 - 박종해



갇혀 있는 와인의 입술을 열어젖히며 코르크 마개를 따자
퐁퐁퐁 새 떼들이 깃을 치며 퉁겨 오른다
촘촘한 굴참나무 숲에서 부화한 새들이 뾰족한 부리로
코르크를 쪼으다 갇혀버린 것일까
와인은 발정난 바다의 가랑이 속으로 나를 몰아넣고
단숨에 나를 마셔버린다
나의 온몸엔 굴참나무의 투깔스런 각질이
덕지덕지 옮겨 붙는다
코르크 속으로 부리를 묻은 새들이 어느새
나의 몸의 각질에 붙어, 나는 둥둥둥 안개 속을 날고 있다
안개비로 몸을 씻은 구름 떼들이 푸른 하늘의 옷자락을 끌고 가다가,
산 이마에다 풀어 놓고 제 갈 길을 찾아 수런수런 서둘러 흩어진다
세상의 길은 어디에나 열려 있구나
코르크 마개 따위가 나를 가두어 놓다니,
꽉 막혀 있던 지나온 길들이 뻥뻥 뚫려서
나의 욕망은 점점 더 헤벌어진다
욕망은 가속도를 갖고 있지만, 날개는 추락의 숙명을 지니고 있다
나의 비상은 마침내 하늘을 등에 업은 굴참나무의 늑골에 부딪히며 추락한다
바람이 코르크 마개를 빙빙 돌리며 회전할 때,
나는 술병 속으로 추락하며 서서히 갇혀버린다
그리고 긴 잠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모든 욕망은 부질없고, 길은 끝이 있다
굴참나무는 세상의 길을 에워싸고, 이제는 더 이상 길을 내어 주지 않는다


코르크 병마개는 또다른 길을 빈틈없이 막기 위해,
혼자 방바닥에 꿈꾸며 뒹굴고 있다



*시집, 소리의 그물, 서정시학








자화상 - 박종해



천길 벼랑 위,
푸른 소나무에 앉은 흰 학을 꿈꾸었으나,
세상의 티끌, 먼지에 물들어
검은 까마귀가 되었다.


세상살이에 아둔하여
더러 발걸음을 헛디디기도 하고,
때로는 여우와 이리를 만나,
온 몸이 할퀴어
가슴에 멍울이 생기기도 했다.


흘러가는 강물처럼
피고 지는 구름처럼 살려고 했는데,
뜻하지 않은 데서 발목 잡히기도 했다.
이제 다시 돌아가 새 길을 걸어보려 해도,
어느새 길 위엔 가을 단풍이 흩날리고 있다.






# 박종해 시인은 1942년 울산 출생으로 성균관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0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이 강산 녹음방초>, <고로쇠 나무 아래서>, <하늘의 다리> 등 다수가 있다. 고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38년의 교직 생활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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