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머물기 위해 떠나다 - 김사이

마루안 2016. 2. 13. 01:10



머물기 위해 떠나다 - 김사이



하필이면 가리봉이었을까
세상의 흑백이 치열하게 공존했던
공단지대 구로동 가리봉오거리
끊임없이 날기만을 기다린다


땅 끝에서 떠나온 곳
서울에 올라와서도 몇 달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지하 쪽방 하나 얻어 가방을 풀고
한낮에도 깜깜한, 틈을 비집고 들어온 가느다란 빛에
아득하게 해바라기하다
불덩이 하나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올라
보따리 구석에 밀어놓은 그대로
꼴딱 새운 가리봉에서의 첫날 밤


돈 벌러 서울 가면 구로동으로 온다는
밑바닥 인생이 거쳐가는 이곳
다섯 갈래 길을 따라 어디로든 가는,
누가 어디에 사냐고 물어볼 때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람들
내 고향보다 더 허름한 빈민촌 같아
자꾸 자꾸 눈에 밟히고 불편하면서도
무슨 짓을 해도 티가 나지 않을 것같이 거리낌 없었던
떠나고자 몸부림쳐도 구로동이었다
내 시가 시작된 곳
젊음의 덫이기도 했던
이 거리 구석구석 몸에 새겨졌다


떠나야겠다
시가 너무 오래 머룰러 있었다



*시집, 반성하다 그만둔 날, 실천문학사








기다리는 게 뭔지도 모르고 기다리는 - 김사이



남도 구불구불한 끝 외진 시골
식당과 민박을 같이 운영하는
간이역 같은 그곳
사람을 후리는 깊은 계곡도 개천도 없고
산세가 빼어난 것도 아닌
둥글한 산들과 펼쳐진 논, 밭 낮은 언덕들
한밤중을 울리는
개구리 뻐꾸기 찌르레기 쓰르라미 소리들
건더기 가라앉고 고인 맑은 된장물 같은
자연이 돌아가는 대로 살아가는 그곳
햇빛 쨍한 날엔 그나마 짭짤하게 들던 손님들도
한 며칠 비가 쏟아지다 뜸하고,
모든 풍경이 소리 없이 가라앉는다


오가는 길가에 걸쳐 있는 집
지붕 아래 쭈그려 앉아
드문드문 달리는 차들을 바라보며
기다리다 무엇인가 기다리게 돼버리는
삶의 끄트머리
토해내면 그칠 것 같지 않은
늙은 주모의 속울음처럼
한없이 쏟아져 내리는 한낮의 단비가
적막하게 내려앉는다
기다리는 게 뭔지도 모르고 기다리는
내게, 가라고, 출렁이는 내게






# 지금은 사라져버린 가리봉동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시다. 모든 것을 새것만이 최고라고 여기는 시대답게 가리봉동역, 구로공단역이 성형수술과 개명을 한꺼번에 했다. 모든 것이 돈으로만 보이는 부동산 투기꾼들의 합작품이다. 내게도 가리봉동은 고향같이 따뜻한 곳이었거늘,,, 사라진 피맛골처럼 가리봉동은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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