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중간한 나이에 서다 - 김수열

마루안 2015. 12. 27. 22:26



어중간한 나이에 서다 - 김수열



종합 검진 받으러 와서
의사와 마주 앉는다

 

"술 하세요?"
"........예"

"많이 하세요?"
"........"

"담배 피우세요?"
"........예"

"많이 피우세요?"
"........"

"운동 하세요?"
"......예, 조금"

"규칙적으로 하세요?"
"........"

 

책상 모서리만 바라보다가
나가보세요, 하는 소리에 맥없이 나오는데
왜 이리도 뒷목이 뻣뻣한 것이냐?
왜 이리도 귓불이 달아오르는 것이냐?


밖으로 나와 담배 물고 애꿎은 하늘에 대고 따진다
-그래, 나, 술, 담배, 다 한다
-그래, 나, 운동, 제대로, 못 한다
-그래, 나, 사십대, 중반이다
-그게, 뭐, 어때서?


내 또래의 낯선 한 사내도
담뱃불 신경질적으로 비벼 끄고 있다

 


*김수열 시집, 바람의 목례, 애지


 






오늘도 버리지 못 했다 - 김수열



닳고 닳아 더는 신을 수 없어
신발장 구석이나 차지하고 있는
한갓 쓰레기에 불과한 것들이지만
함부로 버리지 못 했다


나를 데리고 걸어온 숱한 길을 생각하면
살아온 날들조차 폐기처분되는 것 같아
함부로 버리지 못 했다


가야할 길만을 걸어온 것도 아닌데
가고 싶지 않은 길도 가고
가서는 안 될 길을 간 적도 많은데


그래도 나를 데리고 온 길이
한순간에 지워질 것 같아
여태껏 버리지 못 했다


어쩌다 술자리에서 바꿔 신었을지라도
그 사람이 걸어온 당당함 혹은 비틀거림이
나로 인하여 사라질 것만 같아
함부로 버리지 못 했다


신발장을 열 때마다 아내는
신지도 않는 걸 왜 모셔 두냐며 핀잔이지만
때가 되면 버린다 얼버무릴 뿐


언제 버려야 하는지
꼭 버려야 하는지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 김수열 시인은 1959년 제주에서 태어났다. 제주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고 1982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 어떠랴>,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바람의 목례>, <생각을 훔치다> 등이 있다. 제4회 오장환문학상을 수상했고 <깨어있음의 시> 동인 및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다.


## 열 살, 고추에 털도 안 난 것이 참 어중간했다. 스무살, 군대도 안 갔다가 온 것이 참 어중간했다. 서른살, 결혼도 못한 것이 참 어중간했다. 마흔살,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르고 다시 시작하기에는 조금 늦은 것이 참 어중간했다. 쉰살, 젊은 것도 늙은 것도 아닌 것이 참 어중간했다. 인생은 모든 나이가 어중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