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 별빛 - 강연호

마루안 2015. 12. 18. 00:27



저 별빛 - 강연호

 

 

그리움도 버릇이다 치통처럼 깨어나는 밤
욱신거리는 한밤중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지친다 더 이상 감추어둔 패가 없어
자리 털고 일어선 노름꾼처럼
막막히 오줌을 누면 내 삶도 이렇게 방뇨되어
어디론가 흘러갈 만큼만 흐를 것이다
흐르다 말라붙을 것이다 덕지덕지 얼룩진
세월이라기에 옷섶 채 여미기도 전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구겨버릴 테지만
지금은 삼류 주간지에서도 쓰지 않는 말
넘지 못할 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너에게
가고 싶다 빨래집게로 꾹꾹 눌러놓은
어둠의 둘레 어디쯤 너는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마음은 늘 송사리 떼처럼 몰려다니다가
문득 일행을 놓치고 하염없이 두리번거리는 것

저 별빛 새벽까지 욱신거릴 것이다

 


*시집,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문학세계사

 
 






허구한 날 지나간 날 - 강연호


1
아무도 오지 않는다
허구한 날 내 마음의 공터에는
혼자 놀다 심심해진 햇살 곰곰한 생각에 지쳐 그늘 키우고
기다리는 일 많으면 사람 버리기 십상이라며
귓바퀴에 잠시 머물던 바람결 총총히 사라진다
저 햇살 저 바람도 저녁이면 돌아갈 집이 있는가
고개 갸우뚱하면 침착하게 낙법을 연습하던 나뭇잎 몇 장
내일 또 오마는 약속처럼 어깨에 얹힌다 삶이란
이런 거다 건너편 아파트 베란다에 널렸다 걷히면서
다시 더러워질 결심을 바투 여미는 흰 빨래의 반짝임 같은


세월아, 갈기갈기 찢기고 늘어진
하품에 지쳐 나는 너에게 줄 그리움이 없는데
너는 손 벌리고 자꾸만 손 벌리고


2
사진틀 속에 흑백으로 갇힌 날들이 파닥거린다
더러 지나간 날들이 예쁘게 이마 짚어주지만
아무리 기억의 초인종을 신나게 눌러도
그때, 그 들길, 첫 입맞춤
풀잎 풀잎 풀잎, 서걱서걱 서투르다며 흉보던 날들은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살지 않는다
텅 빈 우편함에는 수취인 불명의 먼지만 쌓여갈 뿐


내 한 번도 같이 놀자고 한 적 없는
세월아, 내가 언제 숨바꼭질하자 했니?
그것도 모자라서 세월아
왜 나만 술래 되어야 하니?

 


*시집, 비단길, 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