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불치(不治)의 마술 - 정병근

마루안 2016. 1. 3. 20:58



불치(不治)의 마술 - 정병근

 

 

티끌 모아 언제 태산을 만들겠는가
한평생 신기한 것만 쫓아다닌 그가
천 리 길을 한걸음에 내달려온 그가
지하도에 앉아 필생(畢生)의 비법을 팔고 있다
쇠고리, 화투장, 카드, 성냥갑들을 좌판에 놓고
그가 마술을 부린다 지나가던 사람들
눈알을 반짝이며 구경한다 아시다시피,
그는 이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인데
일생 동안 그가 추구한 것은
공중 부양, 축지법, 투시력, 염력 따위들이었다
황당한 꿈을 쫓았던 죄로 일흔이 다 되도록
그는 여전히 길거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너무 멀리 와버려서 빼도 박도 못하는
아, 눈앞이 캄캄한 그가 마술을 부린다
콧김을 넣고 화투장을 당기자 거짓말처럼
한 끗 따라지였던 패가 장땡으로 둔갑한다
텅 비었던 성냥갑에 성냥 알이 가득 차고
쇠고리가 쇠고리를 감쪽같이 물고 뱉는 사이,
탈탈 털어먹은 한 남자의 일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시집, 태양의 족보, 세계사

 







튀밥 아저씨의 家系(가계) - 정병근

 


부풀었던 시간이 다 빠져나가자
그의 몸은 짜부라들었다 주름살이 없었다면
그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바늘로 찌르고 싶었던 팽팽한 시절의
기억을 일으킬수록 마음은 이상하게 편안하다


옥수수와 쌀과 동글동글 썬 떡을 부지런히 튀겨낸다
달아오른 튀밥 기계의 멱살을 잡고 꽁무니를 따는 순간,
억눌린 낱알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온다
풍. 비. 박. 산, 사방으로 튀는 튀밥들
뿔뿔이 흩어지는 천애의 고아들


흩어진 튀밥을 비닐봉지에 담아 차곡차곡 쌓는다
하루 종일 튀겨내도 그의 재산은 너무 가볍다
발을 조금만 헛디뎌도 길바닥에 와르르 쏟아질 튀밥들
위태로운 식구들이 비닐봉지 속에 담겨 있다
그는 불알 두 쪽만 달랑 남았다
 
 

 


# 마치 한 편의 단편 영화를 보듯 한 사람의 고단한 인생이 오롯이 담겨 있는 시에서 눈이 번쩍 뜨인다. 누가 이런 사람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폄하할 수 있는가. 어떤 인생이든지 살아남은 자에게는 경의를 표하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고 삐까번쩍 빛이 나는 화려한 인생보다는 이런 인생을 살아낸 사람에게 더 눈길이 간다. 어쩌면 내 지난 날이 늘 헛다리를 짚었고 어긋난 인생이었기에 이런 실패한 인생을 사랑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도깨비 방망이처럼 요술을 부리는 기발한 인생도 없겠으나 잘 나가는 고상한 인생 또한 별로 부럽지 않음에야,, 그런 면에서 나는 천상 삼류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