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벌써, 라는 엊그제 한 말 - 김형출

마루안 2015. 12. 14. 01:07



벌써, 라는 엊그제 한 말 - 김형출



벌써 잊었는가? 벌써, 라는 엊그제 한 말

세월도 농익으면 서럽고 슬픈 법

달력 안에 숫자 몇 톨 털어내는가

아쉬움도 사무치면 그리움인가

내 주변을 방황하는 케케묵은 냄새들

아쉬운 이름들

그립다


기다림인가?

날마다 이별이고 만남인데 어디 마지막이

새삼스럽더냐?

옆길로 새어버린 세월 앞에 선 우리

그리울 때엔 세상은 이미 하나다


오늘같이 좋은 날

차오르는 나잇살 보듬고

나 여기에 있다

꽃이 피고 지고

머리칼에 포위당하고 청춘에 점령당한 우리는

송년의 파티에서 황홀함을 마셔보면 세월의 진미를 안다

근육의 강인함에 금이 간 나의 기억들

흔적 없는 유서를 쓴다


그물을 통과하는 그 세월을

벌써 잊었는가? 벌써, 라는 엊그제 한 말

세월도 농익으면 서럽고 슬픈 법

달력 안에 버거운 숫자 몇 톨 털어내는가

아쉬움도 사무치면 또, 그리움인가

내 주변을 방황하는 케케묵은 냄새들

아쉬운 이름들

그립다

오늘같이 좋은 날,



*시집, 낮달의 기원, 문학의전당








망각을 남기다 - 김형출



무엇을 남긴다는 것,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세상은 온통 잿더미 속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기억과 흔적의 경계에서 망각을 남긴다는 것은

말되 안 되는 우스꽝스러운 얘기이다

기억에 물어봐라

내가 남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내 영혼은 물론

내 몸뚱이조차 내 것이 아닌,

무형의 욕심이니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망각의 본질을 호도하는 자들의 기억일 뿐,

가죽과 이름을 남겨 무엇하랴

기억을 쌓아올릴 것인가

흔적을 없애거라

기억을 위한 망각이리라

망각을 위한 기억이리라

우린,





# 어느덧 연말이다. 벌써, 라는 말에 우울함이 묻어난다. 늘 하는 말들이 다사다난했던 한해란다. 그렇다. 천년 전 사람들도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가장 다사다난했을 것이다. 송년회다 뭐다 모두들 들뜬 분위기에서 벗어나 조용히 이 시를 읽어본다. 연말도 연초도 나의 일상은 평상심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생은 망각하고 남은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