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유가 있었다 - 신광철

마루안 2015. 11. 30. 06:26



이유가 있었다 - 신광철



옛날 어렸을 적에 술을 담그고 남은
술지거미를 사다가 물을 조금 넣고 끓여 먹으면
감주처럼 달착지근한 맛과 함께
어린 나이에도 그 묘한 술맛이 느껴진다
많이 먹으면 취한다
배고파 먹은 것으로 취하는 그 기분을 아는가
우리들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술을 배웠다
삶도 그렇게 배웠다


삶이 실수투성이인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시집, <삶아. 난 너를 사랑한다>, 들꽃

 

 






자화상 - 신광철



인생길은 걸어도 걸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내 인생은 얼마나 더 걸으면 몸에 익을까


들판의 나풀거리는 풀은 가을이면 흔적 없이
사라지더니 봄이면 말발굽소리처럼 살아난다
너는 생의 반란을 한 번이라도 주도한 적 있느냐
진천 유곡 고향집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는
내가 아는 것만으로도 벌써 사십 여 번을 열매 맺었다
너는 배고픈 영혼을 위하여
따끈한 밥 한 상 내어놓은 적 있느냐


삶은 같은 날을 반복해서 사는 것인데도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헐렁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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