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마음의 쿠데타 - 정해종

마루안 2015. 12. 14. 00:55



내 마음의 쿠데타 - 정해종

 
 

한 나라의 역사가 불미스러운 사건들과
그 후유증의 연속이었으므로
역사로부터 먼 곳을 배회했고,
배회하면서 사랑 운운하지 않은 게
정말 다행스럽다


그대들과, 진정 그대들과 더불어
행복하기를 원했으므로
내 삶을 그대들 쪽으로 가져 가고 싶었다
적당히 자리잡고 오랫동안 머물고 싶었다
그러나 불미스럽게도
자리잡고 앉은 곳이 진창이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버리는 양말짝처럼
고물 트랜지스터의 맞추어지지 않는 주파수처럼
삶은 늘 어긋났고 여전히 불미스러웠으므로,
신물나는 것들엔 기대고 싶지 않았으므로,
걸핏하면 마음은 도덕의 건너편을 쏘다녔고
쏘다니며 쿠데타를 생각했다


문학을 버리고 시를 쓰고 싶은,
사랑을 버리고 여자를 만나고 싶은,
끝내 목숨을 포기하고 살고 싶은....
한 번쯤 죽어라고 살아 본 사람만이
굳이 정당하지 않아도 좋은
마음의 전복을 꿈꿀 수 있는 법이다


문간방에서 옥탑으로
옥탑에서 반지하로
이불보따리를 동여 맬 때마다
공화국 하나가 몰락하고 들어섰으므로
자주 옮겨 다녔고, 옮겨 다니며
죽어라고 살 만한 시절을 꿈꾸었다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고려원

 

 






거리에 묻다 - 정해종



번번이 대답 못하면서
십년 세월 들어온 질문 하나,
지금도 길을 걷다보면 다가와
도에 관심 있으시냐고 묻는
핼쑥한 초면의 사내들
刀?... 아, 道!
처음엔 왜 그게 刀로 들렸을까
묻는 쪽이나 피하는 쪽이나
한결 같고 집요한
검뿌연 안개 낮게 깔리는 오후의 종로
도를 닦든 칼을 갈든 집요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날들이다
왜 나는 십년 가까운 세월을
지금 바빠서..., 라고만 대답해 왔을까
얌전히 일에 몰두하다 퇴근시간이 되면
나도 표정을 바꾸고 거리고 나가고 싶다
道든 刀든, 죽음이든 삶이든 알 바 아니라는
저 무표정한 얼굴들 중 하나를 골라
슬며시 옆구리에 칼을 들이밀고 싶다
너 죽음에 대해 관심 있냐?
뭐, 지금 무지하게 바쁘다고?
無知하게

 
 

 


# 정해종 시인은 1965년 경기도 양평 출생으로 추계예대 문예창작과와 중앙대 예술대학원을 졸업했다. 1991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등단한지 20년이 되었지만 시집은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와 <내 안의 열대우림> 단 두 권뿐이다. 이따금 시를 발표하고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시집이 나오기를 기다려본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젖이라는 이름의 좆 - 김민정  (0) 2015.12.15
벌써, 라는 엊그제 한 말 - 김형출  (0) 2015.12.14
먼 것들이 선명하다 - 김추인  (0) 2015.11.30
이유가 있었다 - 신광철  (0) 2015.11.30
살고 싶다 - 이창숙  (0) 2015.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