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먼 것들이 선명하다 - 김추인

마루안 2015. 11. 30. 06:31



먼 것들이 선명하다 - 김추인



그곳을 기억한다
어둠 몇 무서움 몇 기괴함 몇
그런 비밀스런 구석들을 가지고 있던
유년의 창고를
금 간 흙벽 틈새로 빛살 들어와 해살치고
먼지 알갱이들 빛살치며 부유하던 그곳을
할머니 엉덩이에 꼭 맞았을 사기요강이며
끄름 앉고 침침한 할아버지의 등잔
이 빠진 칼이나 군화짝들의
작은 요술 창고이던
우리 집 고방을 기억한다
동구 밖 공동묘지 쪽으로 난 신작로 가에
밤길을 옥죄던 큰 창고 하나
바람이나 귀신새나 울었을 그곳도
종이 눈 펄펄 날리는
경모 오빠의 <철조망>이 시연되는 날은
징소리 지잉~ 지잉~
오색등이 내걸리는 마술상자였던 걸 기억한다


유년의 창고는 모두 꿈꾸는 공터다
툇마루서 혼자 내다보는 밤하늘은
캄캄하게 열려 있는 궁전
무량의 어둠창고였으며
조각별들의 창고였으며
가장 눈부신 어둠의 곳집이던 걸 기억한다



*시집, 전갈의 땅, 천년의시작








벗어 놓은 그의 생을 보았다 - 김추인



삶은 살의 길인 게다
알게 모르게 씹히면서
슬픔처럼 부풀면서 따뜻하면서
변용되어 가던 살의 시간들
한 생애 걸어온 길 위에서
사무치게 돌아보는 살의 기억들 무참하고
남은 술잔에 서천이 붉었으리
다 늦은 저녁 때
구름장만 같은 일상도 도리 없이 붙안고 가는
늙은 살의 길이 붐볐겠다만
어느날 무단히 다운된 PC 속 화면처럼
정지의 일순간
이쪽 저쪽 생의 단추들 다급히 짚어 보지만
작동을 거부하는 살의 침묵- 차고 단단했다.


눈도 입도 미처 못 다문 채 벗어 놓은 너의 생
마지막 살의 표의(表意)
네가 응시하는 그 끝 간 데, 거기는 아름다우냐





# 삶을 관조하는 깊이와 서정성이 짙게 느껴지는 시인이다. 늦게 읽은 김추인의 시가 가슴을 파고드는 늦가을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벌써, 라는 엊그제 한 말 - 김형출  (0) 2015.12.14
내 마음의 쿠데타 - 정해종  (0) 2015.12.14
이유가 있었다 - 신광철  (0) 2015.11.30
살고 싶다 - 이창숙  (0) 2015.11.27
갈매기와 바다 - 조오현  (0) 2015.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