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갈매기와 바다 - 조오현

마루안 2015. 11. 22. 22:33



갈매기와 바다 - 조오현



어제 그끄저께 일입니다, 뭐 학체 선풍도골(仙風道骨)은 아니었지만 제법 곱게 늙은 어떤 초로의 신사 한 사람이 낙산사 의상대 그 깎아지른 절벽 그 백척간두의 맨 끄트머리 바위에 걸터앉아 천연덕스럽게 진종일 동해의 파도와 물빛을 바라보고 있기에

"노인장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아침나절에 갈매기 두 마리가 저 수평선 너머로 가물가물 날아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 여태 돌아오지 않는군요."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초로의 그 신사는 역시 그 자리에서 그 자세로 앉아 있기에
"아직도 갈매기 두 마리가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했더니
"어제는 바다가 울었는데, 오늘은 바다가 울지 않는군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선집, 적멸을 위하여, 문학사상








자갈치 아즈매와 갈매기 - 조오현



사내대장부 평생을 옷 한 벌과 지팡이 하나로 살았던 설봉(雪峰)스님은 말년에 부산 범어사에 주석했는데 그 무렵 곡기를 끊고 곡차를 즐겼지요.

그날도 자갈치 그 어시장 그 많은 사람사람 사투리사투리 물비린내물비린내 이것들을 질척질척 밟고 걸어 들어가니, 생선좌판 위에 등이 두툼한 칼로 생태를 토막 내고 있던 눈이 빠꼼한 늙은 '아즈매 보살'이 무르팍을 짚고 꾸부정한 허리를 펴며 뻐드렁니 하나를 내어 놓았지요.

"요새 시님 코빼기도 본 사람 없다캐싸서 그마 시상살기 싫다캐서 열반에 드셨나 했다캐도요. 오래 사니 또 보겠다캐도....."

이러고는 바짝 마른 스님의 손목을 거머잡는가 싶더니 치마 끝으로 눈꼽을 닦아내고, 전대에서 돈 오천 원을 꺼내어 곡차 값으로 꼭 쥐어 주고, 이번에는 빠닥빠닥한 일만 원권 한 장을 흰 봉투에 담아 주머니에 넣어 주면서,

"둘째 미누리 아아가 여태 태기가 없다캐도.... 잠이 안 온다캐도요. 둘째놈 제대 만기제대하고 취직하마 시님 은공 갚을끼라캐도요. 그마 시님이 곡차 한 잔 자시고요. 칠성님께 달덩이 머스마 하나 점지하라카소. 약소하다캐도 행편 안 그렁교?"

하고 빠꼼빠꼼 스님을 쳐다보자, 스님은 흰 봉투 속을 들여다보고는 선화(禪話) 하나를 만들었지요.

"아즈매 보살! 요새 송아지 새끼 한 마리 값이 얼마인 줄 알고 캅니꺼? 모르고 캅니꺼? 도야지 새끼도 물 좋은 놈은 몇만 원 한다카는데에 이것 가지고 머스마 값이 되겠니꺼?"

그러자 그 맞은편 좌판 앞에서 물오징어를 팔고 있던 젊은 아즈매 보살이 쿡쿡 웃음을 참다못해 밑이 추지도록 웃고 말았는데, 때마침 먹이를 찾아왔던 갈매기 한 마리가 그 웃음소리를 듣고 멀리 바다로 날라 갔는데, 그 소문을 얼마나 퍼뜨렸는지.....

그 후 몇 해가 지나 설봉스님 장례식 때는 부산 앞바다 그 수백 마리의 갈매기들이 모여들어서 아즈매 보살들의 울음소리를 흑흑흑.... 흉내를 내다가 눈물 뜸뜸 떨구었지요.





# 詩라고 생각하고 읽다가, 視라고 생각하며 읽다가, 始라고 생각해서 읽다가, 施라고 생각하라 읽었다. 아! 어쩌다 내가 글자를 깨우쳐 이런 호사를 누린단 말인가. 문맹을 면한 것이 한없이 고마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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