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자화상 - 류시화

마루안 2015. 11. 22. 21:55

 

 

자화상 - 류시화

 

 

행성의 북반구에서 절반의 생을 보냈다
곧 일생이 될 것이다
서른 살 이후 자살을 시도한 적 없다, 아 불온한 삶
사랑은 언제나 벼랑에 서 있었다
나를 만난 사람은 다 떠나갔다
가족력은 방랑이었다
아버지는 농부였으나 자식은 몇 대 위
유목의 혈통을 물려 받았다
새벽부터 길 나서 부지런히 걸었지만 아직 이만큼밖에 오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계속해서 가면 어딘가에 도달하리라는 것이
밑도 끝도 없는 사상이었다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했고, 정신이 아주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었으므로
그 생각은 아직 유효하다
적들이 사라진 세상
그래서 모두가 모두를 적으로 만드는 세상을 떠나
갠지스 강가에 앉아 있곤 했다
모국어의 영토에 산수유 피었는가 그려 보면서
화장터 불빛 바라보며 삼십 대와 사십 대를 보냈다
고통받은 것은 이질감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의 이물감이었다
밀교를 믿고 성직자보다는 샤먼을 믿고
연어의 회귀를 믿는다
사랑이 끝날 것을 믿고, 그럼에도 사랑보다 오래가는 것은 없음을 믿는다
배추흰나비가 우주와 교감한다는 것을 믿고
그 대신 정치인이 된 혁명가들을 믿지 않는다
자주 기다린다 시를
단어들의 번쩍이는 비늘을
까많고 까만 밤의 바다에서
집어등(集漁燈)을 켜고
파도 속에 등 푸른 물고기 떼처럼 밀려오는
시어(詩魚)들 상상하며
멀리 돌을 던지는 것을 좋아한다
던진 손을 떠나
돌 하나가 자신의 전부를 다해 날아가는 것을
무엇을 일별하고 떠날지 모르지만
죽으면 가벼운 운구가 되기를 바란다, 아 부박한 삶
누구의 어깨에도 짐이 되지 않기를
다만 적멸에 들기를
겨울에 목련의 봉우리들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안에 접혀져 있는 흰 꽃들을
어둠이 오면 목련들이 저의 방에서 불을 켜는 것을
이 세상 모든 비유와 상징들을 한곳에 모은다 해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 불가사의한 부재에 대해
내륙 산간 지역에 내려진 대설주의보를 뚫고 날아온
겨울새 한 마리
내 늑골 부근에서 성긴 졸음을 졸고 있다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문학의숲


 

 

 



# 예전에 헌책방에서 류시화 시인의 시집을 발견했다. 서점에 갈 때마다 그의 시집이 항상 눈에 띄기는 했어도 그의 시집을 사서 읽은 것은 처음이다. 시인은 그의 이름이 들어간 책은 모조리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출판계에서는 초대박을 터뜨리는 밀리언셀러 작가다. 그런 반면에 평론가들이나 문화계에서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세 번째 시집을 낸 것이다.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시인이면서도 생각보다 시집이 많지 않은데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1991년>와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1997년>에 이어 16년 만에 시집을 냈다고 한다. 시인은 1년의 절반을 길에서 보내는 여행자로 살기 때문에 시를 종이에 쓰지 않는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입 속에서 수없이 중얼거리며 외워서 시를 쓴다는데 그런 탓에 길 위에서 미처 입에 붙지를 못하고 유실된 시가 여러 편이라고 한다. 누구나 공감하는 쉬운 어휘로 시를 쓰는 감성 시인이라는 찬사에서부터 신비주의를 팔아 먹는 약장수 시인이라는 혹평까지 듣는 시인이지만 아무리 출판계의 불황기라 해도 그가 낸 책은 언제나 베스트셀러가 되는 걸 보면 독자들의 마음을 훔치는 뭔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곳에 시를 올리기 전에 항상 한두 번씩은 읽고 올리는데 '자화상'을 낭송하다 "아, 불온한 삶"에서 목소리가 떨리더니 "아, 부박함 삶"에서 나도 모르게 울컥 하며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것은 어인 일일까. 울고 싶은 놈 뺨 때린 격으로 시를 읽다가 마치 내 이야기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움직였던가 보다. 살다 보니 시 읽다 우는 일도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