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톱을 깎으며 - 성선경
-목욕탕 가는 남자
발톱을 깎네
아주 낯익은 친구를 대하듯
고개를 숙여 천천히 발톱을 깎네
왜 이렇게 뒤틀렸냐 물으며
아주 어린 새순을 다루듯 조심조심하면서
내 지나온 길들의 외지고 험난한 갈들을 깎네
아주 괜찮은 날들도 있지 않았나 달래며
발톱을 깎네 아주 잊지는 않았다고
내가 모른 척하고 싶어서가 아니라고
오랜만에 만나니 더 반갑다고
그동안 잘 지내줘서 고맙다고
농우소의 등을 쓰다듬듯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발톱을 깎네
이젠 찌그러진 반달도 되지 못하는
저문 하현달
발톱을 깎네.
*시집, 몽유도원을 사다, 천년의시작
몽유도원도 - 성선경
-목욕탕 가는 남자
혼자 깨어 있는 새벽이라 생각합니다.
간혹 이 새벽은 나 혼자의 것이라 생각합니다.
몽유도원(夢遊桃園)에 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눈 감아야 닿을 수 있는 세계를
눈 뜨고도 가 닿을 수 있다고
수건 한 장의 맨몸으로 물 담궈봅니다.
몽유도원에는 저 생고무처럼 질긴 인연의
사람이 없다고 혼자 입몽(入夢)에 듭니다.
그때 그러면 너는 뭐냐고
팔뚝이 굵은 승천하지 못한 용 한 마리
슬그머니 기어듭니다. 고개를 돌리면 아직
용도 되지 못한 이무기, 또 이번엔 머리를 쳐든 뱀이
나타납니다. 그만 이 자리를 피하고자 돌아서면
전갈과 호랑이 온갖 징그러운 그림들이 물방울을 튀깁니다.
차라리 등활지옥(等活地獄)이 낫겠다고 자리를 옮기면
어허 거기엔 또 한 송이의 장미 한 송이의 국화
한증막에서 땀 흘리는 꽃을 만납니다.
누구나 꽃이 되고 싶은 모양입니다만,
나는 또 그 꽃에 자지러지고 식은땀 흘립니다.
도원(桃園)에도 참 많은 무서운 것들이 꿈틀거립니다
사람이 없는 도원(桃園)에서도 나는 참 무서워
혼자 깨어 있는 새벽에도 입몽(入夢)하지 못합니다
도원(桃園), 늘 꿈 속에서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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