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발톱을 깎으며 - 성선경

마루안 2015. 11. 11. 23:58



발톱을 깎으며 - 성선경

-목욕탕 가는 남자



발톱을 깎네

아주 낯익은 친구를 대하듯

고개를 숙여 천천히 발톱을 깎네

왜 이렇게 뒤틀렸냐 물으며

아주 어린 새순을 다루듯 조심조심하면서

내 지나온 길들의 외지고 험난한 갈들을 깎네

아주 괜찮은 날들도 있지 않았나 달래며

발톱을 깎네 아주 잊지는 않았다고

내가 모른 척하고 싶어서가 아니라고

오랜만에 만나니 더 반갑다고

그동안 잘 지내줘서 고맙다고

농우소의 등을 쓰다듬듯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발톱을 깎네

이젠 찌그러진 반달도 되지 못하는

저문 하현달

발톱을 깎네.



*시집, 몽유도원을 사다, 천년의시작








몽유도원도 - 성선경

-목욕탕 가는 남자



혼자 깨어 있는 새벽이라 생각합니다.

간혹 이 새벽은 나 혼자의 것이라 생각합니다.

몽유도원(夢遊桃園)에 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눈 감아야 닿을 수 있는 세계를

눈 뜨고도 가 닿을 수 있다고

수건 한 장의 맨몸으로 물 담궈봅니다.

몽유도원에는 저 생고무처럼 질긴 인연의

사람이 없다고 혼자 입몽(入夢)에 듭니다.

그때 그러면 너는 뭐냐고

팔뚝이 굵은 승천하지 못한 용 한 마리

슬그머니 기어듭니다. 고개를 돌리면 아직

용도 되지 못한 이무기, 또 이번엔 머리를 쳐든 뱀이

나타납니다. 그만 이 자리를 피하고자 돌아서면

전갈과 호랑이 온갖 징그러운 그림들이 물방울을 튀깁니다.

차라리 등활지옥(等活地獄)이 낫겠다고 자리를 옮기면

어허 거기엔 또 한 송이의 장미 한 송이의 국화

한증막에서 땀 흘리는 꽃을 만납니다.

누구나 꽃이 되고 싶은 모양입니다만,

나는 또 그 꽃에 자지러지고 식은땀 흘립니다.

도원(桃園)에도 참 많은 무서운 것들이 꿈틀거립니다

사람이 없는 도원(桃園)에서도 나는 참 무서워

혼자 깨어 있는 새벽에도 입몽(入夢)하지 못합니다

도원(桃園), 늘 꿈 속에서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