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 가을 이후 - 이희중

마루안 2015. 11. 11. 23:56



이 가을 이후 - 이희중

 
 

저 은행잎들 다시는 지지 않도록
다시는 풍경이 말하는 일이 없도록
밤하늘을 가득 채운 숨은 별들이 다 드러나지 않도록
세상 모든 별들을 끝내 사람들이 다 보지 못하도록
담배 연기가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제발, 불꽃이 사람 근처를 떠나지 않도록
한번 저지른 모진 죄를 언제까지나 용서하지 않도록
아무하고나 화해하지 않도록
잃어버린 물건은 다시 찾을 수 없도록
헤어진 사람과 다시 만나는 일이 없도록
수억년 동안 시달려온 저 지친 은행잎들 다시 지지 않도록
다시는 물들지 않도록, 다시는 수직낙하하지 않도록

그래도 지지 않을 수 없다면 새잎으로 다시 피지 않도록
저들의 야합과 의리가 끝장나지 않도록
사람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하도록

사람이 아닌 무엇으로도 태어니지 않도록
설사 새로 태어난들 서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옛날옛날 그가 풍경 속에 숨긴 것을 사람들이 찾지 못하도록
정말 그가 무엇을 숨겨놓기나 한 것인지도 믿지 못하도록
갖은 풍문이 풍문일 뿐임을 깨닫지 못하도록
이 게임의 법칙을 되새기지 못하도록
이미 잠깬 이 도로 잠들지 않도록
아직도 자는 이 깨어날 필요 없도록
사랑의 빈틈이 다 채워지지 않도록
결코 사랑이 완성되지 않도록
저 은행 노란 잎들 새 아침까지 지지 않도록
어지간하면 새 아침은 오지 않도록
지금 듣는 네 웃음소리, 또는 저 은행잎들 오늘처럼 찬연하도록



*시집, 참 오래 쓴 가위, 문학동네

 







후진금지 - 이희중



지옥은 아니지만 이 별의 삶은
내가 여행하는 별들 가운데 비교적 피곤한 편
이 별은 한번 저지른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독특한 원리를 끝없이 강조하는 학교
이를테면 그것이 이 거대한 학교의
치사하고 아니꼽고 더럽고 유치한 교과
교실의 흑판에는 이렇게 씌여 있지
注意! 한번 가면 절대로 돌아올 수 없음
後進禁止, 그래서 이 별에서는
불쌍한 사람들이 안타까이 뒤를 돌아보며
살아간다, 눈물로 바다를 이루며
그 물살에 스스로 가슴을 다치며
죽어 간다, 그러나 다행스러워라, 이 별을
一周하는 사람들은 단 한 번 죽을 기회가 있다네



*시집, 푸른 비상구,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