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시들지 마라 원추리꽃 - 강인한

마루안 2015. 11. 10. 11:20



시들지 마라 원추리꽃 - 강인한



백 년 전에도 너는 그렇게 아름다웠다
삼층 전시실에서
발뒤꿈치의 시간을 뜯어내고 내려온
모네의 원추리꽃
시들지 마라 여인이여
해 뜨면 하늘 푸르러지고
죽었던 짐승도 노래 속에 다시 살아난다
내가 돌아볼 때까지 눈물을 닦고
거기 서 있어라 길고도 슬픈 목을 세우고
백 년의 시간을 넘어 살그머니 돌층계에 앉는 바람
당신이 자판기에서 뽑아온 커피 한 잔
우리들 사랑도 이처럼 쓰고 또한 달콤했거니
세월이 가도 시들지 마라
꽃이여 내 여인이여
아직은 당신의 이름 불러줄 사람
저 어두운 지하철역 출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니
시들지 마라 오랜 옛날에도 아름다웠던 사랑
오늘 다시 네 앞에 꽃 피울 사람 있으니.



*강인한 시집, 입술, 시학사








달이 떠오를 때까지 - 강인한



깨어진 술병의
사금파리에 발을 베었을까 그 갈매기
기울어진 목선의 빈 돛대 위에서 쉬고 있었을까
끼룩끼룩 차갑게 울다가 사라진 뒤
어디쯤 우리들이 찾아 헤매는 수평선이 걸렸는지
하늘도 구름에 몰려 어둑한 그때
어둠 속에 점점이 희게 빛나는 것들
무엇일까 반디불인 듯
멀리서 흔들리며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 위의 신기루같이
아니 유령의 도시같이 불을 켜고
어서 오라 어서 오라고
우는 듯 조는 듯 흔들리는 것,
바람이 불고 구름이 바람과 몸을 바꿔
모래밭을 철썩이는 파도가
서로 떨어져 웅크리고 앉아 있는 우리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슬그머니 보름달이 밀어 올릴 때
스무 살의 바다
깨진 유리 조각처럼 지느러미가 슬프게 빛나고.






강인한 시인은 1944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서 첫시집 <이상 기후> 이후, <불꽃>, <전라도 시인>, <우리나라 날씨>, <칼레의 시민들>, <황홀한 물살>, <푸른 심연>, <입술> 등이 있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은 강동길, 치과의사 이름으로 잘 어울리는 강동길 대신 姜寅翰으로 시인임을 알렸다. 그의 시와 꼭 어울리는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