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까마귀, 둥지 속으로 날아든 새 - 서규정

마루안 2015. 11. 10. 09:23

 

 

까마귀, 둥지 속으로 날아든 새 - 서규정

 

 

여기가 대체 어디야

멀쩡한 사람 주눅 들어 발 저리게 하고

방광에 오줌이 가득 차도 시원스럽게 눌 수 없는 곳

가사상태의 환자들만 득시글득시글

우리 모두 몰려 왔는데, 아는 사람은 없고

휴대폰만 있어

걸려오지 않는 전화에도, 번지는 통증

쩌릿쩌릿

휴대폰은 심장이 된지 이미 오래다

기기가 울린다는 것, 그것이 그리 가슴 아파

줄무늬 시트처럼 시간이 흘렀던가

삼등열차 복도와 같이 북적대는 입원실 입구에

눈에 번쩍 띄는 낙서 한 줄

 

불치병일수록 더욱 좋다, 뉴 타운의 팻션

 

사람은, 환자복을 입고선 누구나 그지없이 착하고

누웠다 일어설 땐 당연히 흔들림을 쥐어 잡듯이

찌륵 찌르르 진동음은 받지 않아야 더 깊고 길게 울린다

 

 

*시집,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작가세계

 

 

 

 

 

 

청춘 - 서규정

 

 

눈 깜빡할 순간이 이렇게 길어질 줄이야, 소가죽 공장에 들어가

소처럼 일을 하면서도 난생 처음 직장을 얻어 뿌듯했지

건너편으로 빵순아! 하고 부르면

이 가죽 껍데기들아! 바로 응답이 오던

빵, 빵공장의 아가씨들은 누렇게나마 생기로 부풀고

변두리 쪽방에선 드르륵 짜르륵 요꼬* 짜던 소리

살판들이 났을까

뒷산엔 진달래꽃 무더기, 앞 개천엔 무지갯빛 기름띠

그냥 저냥 받아들이자, 산다는 건 저항이 아니다

믿고 또 믿던 순간들이 너무너무 지루해서야

저임금에 떨고, 맨 밑바닥이라는 사실에 떨다

앉아도 검은 새만 내려앉던 굵은 전선줄 같던 암울한 미래는

암전보다 차라리 감전이 낫다 싶고

더 떨어야 할 게 없어

술을 먹고 수전증처럼 손을 덜덜 떨 때

씨잘 데 없는 민주투사라는 족속들에 의해 세상이 확 바뀐 뒤

 

너는 인마 내가 아니야, 아니다

웬 덥수룩한 사내가 최면술사처럼 거울 속에서 떠들어

 

멀고 가까울 것도 없는, 저 청춘이라는 거울을 어떻게 건너야 하나

 

 

*요꼬: 털실을 짜던 편물기계

 

 

 

 

# 서규정 시인은 1949년 전북 완주 출생으로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황야의 정거장>, <하체의 고향>, <직녀에게>, <겨울 수선화>, <참 잘 익은 무릎>,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등이 있다. 한국해양문학상, 부산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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