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뚝딱, 한 그릇의 밥을 죽이다 - 이덕규

마루안 2015. 11. 9. 08:58



뚝딱, 한 그릇의 밥을 죽이다 - 이덕규



먼 들판에서 일에 몰두하다 보면 문득 허기가 밀려와 팔다리를 마구 흔들어댈 때가 있다 사람을
삼시 세끼 밥상 앞에 무릎 꿇려야 직성이 풀리는 밥의 오래된 폭력이다
때를 거르면 나를 잡아먹겠다는 듯이
사지를 흔들어대는 허기진 밥의 주식(主食)은 그러니까 오래전부터 사람이다
결국 사람은 모두 밥에게 먹힌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빈 밥통의 떨림


그러나, 우물처럼 깊고 어두운 밥통의 고요한 중심에 내려가 맑은 공명을 즐기듯
먹먹하게 담배를 피워 물고 논두렁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감쪽같이 배고픔이 사라지고 어떤 기운이 나를 다시 천천히 일으켜 세우는 것인데, 그 힘은
내 마음 어딘가에 마지막으로 밥을 제압하기 위해 비축해둔 또 다른 밥의 농밀한 엑기스인 치사량의 독과 같은 것이다


그 옛날 사나흘 굶고도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벌떡 일어나 품을 팔았던 어머니들처럼
수시로 닥치는 밥의 위기 때마다 마지막인 듯 두 눈 부릅뜬 채 막다른 곳으로 밥을 밀어붙이면 비로소
밥은 모락모락 두 손 들고 밥상 위로 올라온다
그래 먼 들판에서 하던 일 마저 끝내고
허적허적 돌아와 그 원수 같은 한 그릇의 밥을 죽이듯 뚝딱, 해치우고 나면
내 마음의 근골 깊은 절미항아리 속으로
낮에 축낸 한 숟가락의 독이 다시 꼬르륵, 들어차는 소리 듣는 것이다



*시집, 밥그릇 경전, 실천문학사








한판 밥을 놀다 - 이덕규



상갓집 마당 끝 절구통 위에 올려놓은 사잣밥을
순식간에 배 속에 털어 넣은 상거지가 오랜만에 뜨듯해진 밥통을 흔들며
눈 덮인 논둑길로 엎어지고 자빠지며 달아나다가
한순간 획, 돌아서서 이쪽에 대고 커다란 주먹 감자를 날렸다네


그때, 킬킬대던 어른들 사이
창검 비껴 차고 팔뚝 같은 쇠사슬을 어깨에 둘러멘 저승 식객 하나가
그 꼴을 망연히 바라보다 돌아서서
이제 막 밥숟가락 내려놓은 사람 앞세우고
시장타, 서둘러 떠나며 중얼거렸다네


오죽하면 사잣밥을 목에 매달고 다니면서 밥 버는 사람들이 있겠느냐
저승법보다 무서운 밥!





*시인의 말


들판에서 일을 할 때,
어느 순간 힘의 한계애 이르러 미세하게 떨리는 손목 관절이나 장딴지 근육쯤에서
꽃 멍울 터지는 소리가 난다.


(몸을 아껴 쓰는 것은 생을 낭비하는 것)


척박한 몸속에서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그 힘겨운 감탄사가
정녕 시의 향기로운 입김이라면.... 나는 여전히 꽃다운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