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고시원에서 - 차창룡

마루안 2015. 11. 9. 07:18



고시원에서 - 차창룡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이곳에서 산다
한때는 야망을 품고 이곳에 왔고
한때는 갈 데가 없어 이곳에 왔으나


가족들과 헤어진 사람들이 이곳에서 산다
가족들을 잊기 위해 산다
가족들을 잊지 못해 산다
가족들과 영영 헤어지기 위해 산다


헤어짐이란 고시와도 같은 것
나는 날마다 고시공부하듯 결별의 책을 읽는다
벽마다 책이 쌓여서 무너질까봐
그 위를 무거운 책으로 눌러놓고는


나를 포위한 책 속에서 행복하다
책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게는
책으로 만든 장작불이야말로
최고의 다비식을 제공할까


바람이 많은 곳이어서 바람은
혹은 바람이 전혀 없는 곳임에도
없는 바람마저 뼛속을 누빈다
뼛속을 빼고는 관속처럼 아늑하여라
창문 없는 내 방이여


참 이상하다 사람이란
바람을 피해 바람이 없는 방을 찾더니
바람이 그리워 방을 옮기는 사람이란
바람을 배반하고는 바람에게 배반당하리


옮기자마자 북쪽에서 바람이 몰려온다
고립의 성채를 두드리는 바람 두려워
나는 확 창문을 닫는다
바람과 함께 들어오던 삼각산이
유리에 이마를 부딪혀 푸른 피를 흘리는데도

 


*시집, 고시원은 괜찮아요, 창비
 







고시원은 괜찮아요 - 차창룡



이 선원의 선승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오직 혼자이지요
홀로 존귀한 최고의 선승들입니다
108개의 선방에는 선승이 꼭 한 명씩만 들어갈 수 있어요
여느 선방과 달리 방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습니다
잠을 자든 공부를 하든 밥을 먹든 자위행위를 하든
혼자서 하는 일은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가끔 심한 소음이 있어도 자기 일이 아니면 가급적
상관하지 않습니다 정 참지 못하면
총무스님에게 호소하면 됩니다
중국 일본 필리핀 말레이시아 방글라데시 그리고 한국
식탁에는 온통 외국인뿐입니다
이곳은 외국인을 위한 선원인 것이지요
금지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양간에 함께 모인 선승들은 말이 없습니다
말은커녕 입도 벌리지 않고
그들은 밥을 몸속으로 밀어넣습니다
다년간 수행한 덕분이지요
오래 수행한 선승일수록 공양할 때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뱃속으로 고요의 강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이르면
가끔 화장실에 갑니다 화장실은 늘 만원입니다
괜찮습니다 참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수행법이니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불이 나도 괜찮아요
13호실에 비상용 사다리가 있지만
서로 간섭하지 않는 미덕이 습관이 되어
나와 직접 관계되지 않은 일에는 끼어들지 않습니다
괜찮아요 불이 나도 어차피 열반에 들면
누구에게도 방해되지 않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