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낭만에 대하여 - 나호열

마루안 2015. 11. 8. 23:50

 

 

낭만에 대하여 - 나호열

 

 

낭만이라는 찻집은 바닷가에 있다
방파제 끝까지 가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문은 항상 열려 있다
대부분 서서 있게 마련이지만
음악은 늘 신선하다
적당한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처럼
테이프는 조금 늘어져 있다
며칠씩 묵고 가는 사람은 없다
밀물이 오면 지워지는 발자국 몇 개 남기고
갯바위에 붙은 따개비를 헤적거리다가
추억 속에 노을을 엎지르고 황급히 길을 되짚는다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끝이 보이지만
빈 그물 속에 끌려 들어온 바다를
버리지 못해 한 평생 끌탕을 하는 어부들에게
수평선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방파제 끝까지 가지 않지만
방파제 끝이 바다의 시작인 것을


낭만이라는 찻집은 바닷가에 없다

 

 

*시집, 눈물이 시킨 일, 시학사

 

 

 

 

 

 

운동 후기 - 나호열
-노동이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

 

 

몸에서 화약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 것은
그해 시월 때문이다
놀이와 노동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늘 힘이 모자랐다
낙하하는 포탄의 작열과
가지에서 떨어지는 벚꽃의 아우성이
피와 살의 힘
나는 빗나간 화약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들이 진 만큼
또 수없이 많은 꽃들이 피어났던 까닭에
우리는 놀이와 노동의 근친을 잊었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홍조 그 부끄러움은
무거운 짐을 나르는 한 사내의 불끈거리는
팔뚝의 힘줄을 볼 때 더하다


앞으로 밀고, 잡아당기고, 위로 올리고
걷고 뛰면서
나는 한 사내를 이기고 싶다
누가 노동이 자유롭게 한다고 했는가
짐승의 시간이 초식의 슬픔을 잘게 부술 때
땀은 화약 냄새를 짙게 풍긴다.


지금 내가 들어 올리는 것은
0그램의 허무
깊은 날숨이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 정문에 아치로 걸려 있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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