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멀리서 받아 적다 - 복효근

마루안 2015. 11. 7. 00:18



멀리서 받아 적다 - 복효근



국화 마른 대궁을 베어버리려 낫을 들이대니
시들어 마른 꽃 무더기에서
뭉클한 향기 진동하다


서리 몇 됫박 뒤집어쓰고
잎부터 오그라들 적에
오상고절도 어쩔 수 없구나 했더니
아서라 시취(屍臭)까지 향기로 바꾸어내는 고집
그 꽃다운 오만 앞에서 낫을 거두다


인도하듯 다시 뱁새 몇 마리
그 그늘 아래 찾아들고
하, 고것들의 수작이라니
밤새 서설이 내려 꽃을 새로 피우다


애초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었다



*시집, 따뜻한 외면. 실천문학사








늦가을 - 복효근



술 덜 깬 아침 한나절
약속 어긴 것 화 안 내고
혼자서 지리산 둘레길 산행 나가는
낡은 아내 미웁지 않다


혼자 돌아가는 음악
무슨 뜻인지 몰라 소프라노
낯선 나라 말 그냥 악기소리처럼 싫지 않다


너무 많은 나에게 내가 지쳐서
전화 한 통 없는 이 쓸쓸함이 좀 오래갔으면 좋겠다


마당귀엔 산에서 옮겨 심은 용담
꽃잎 벌리는 의뭉스런 햇살 손길
내 몸이 간지럽다


벌 한 마리 꽃우물에 빠져 맴돌고
가만가만 진저리 쳐대는 꽃
저들의 한바탕 음화 같은 풍경에
때 아닌 내 거시기가 선다


무리에서 쳐져서 산다는 부끄럼 말고도
쳐진 자만이 아는 권태로운 즐거움도 있어
아주 먼, 여자를 떠올리며 수음을 했다


이 좀스러운 외도가 그리 죄스럽지 않은
마흔아홉 늦은 가을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시원에서 - 차창룡  (0) 2015.11.09
낭만에 대하여 - 나호열  (0) 2015.11.08
무위사 뜰에 내린 가을 - 손수진  (0) 2015.11.06
가을 일기 - 백인덕  (0) 2015.11.05
최후의 늑대 - 최금진  (0) 2015.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