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무위사 뜰에 내린 가을 - 손수진

마루안 2015. 11. 6. 08:45



무위사 뜰에 내린 가을 - 손수진



느티나무가 몸 흔들어
미련같이 남은 잎을 털어내는 늦가을 오후
팔랑거리는 계집아이 손을 잡고
극락보전 부처님 앞에 엎드린
젊은 사내의 발뒤꿈치가 눈부시다
이슬 촉촉한 까마중 같은 눈빛으로
작은 엉덩이 쳐들고 절 하던
아직은 작고 여린 것이
경내를 돌아 사천왕문을 나서며
빨간 단풍잎 같은 손을 가슴에 모으고
안녕히 계세요 엄마!
안녕히 계세요 엄마!
바람이 흔들고 가는 풍경 소리보다 더
맑고도 낭랑한 음색에
수천 마리의 노랑나비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른다



*시집, 붉은 여우, 한국문연








거미, 베를 짜다  - 손수진



오래된 집에 거미가 산다
그 집의 역사만큼 오래된 거미 밤마다 실을 뽑아 베틀에 건다


나고야에서 나고 자랐니라
해방이 되자 너도 나도 귀국길에 올랐니라
사나흘이면 가리라던 귀국길은 달포가 넘어 걸렸니라
시모노새끼에서 규슈로 가는 야미 배를 타고
동지섣달 바람은 얼마나 부는지 까불까불 가랑잎 같았니라
누렇게 부황 든 사람들은 바닥에 짐짝처럼 구겨져 있었니라
산후조리 못해 병든 어머니는 아버지가 부축하고
핏덩이 동생은 내가 들쳐 업고, 애면글면 군산항에 내렸는데
쓰리꾼이 아버지 허리춤에 찬 전대 귀신같이 털어가고
지게꾼에게 매낀 보따리마저 잃어버리고
석탄차 얻어 타고 대구에 내리니 염생이 마냥 눈알만 반들반들
그런 우스운 꼴이 없었니라
고향집에 돌아와 열흘 만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닷새 후에 딱정벌레처럼 붙이고 다니던 동생마저 세상 뜨고
그때 나이 열일곱
열아홉에 시집이라고 왔더니라
예단이라고 벌거지 터진 물들인 것 같은 명주베 넉자, 뿔스무리한 저고릿감 넉자
일곱세 무명베 두루마기 흑감 한 감, 동동구리무 한 통, 덧분 한 통
시집오는 날 아침까지 손수 밥해먹고
분 한번 못 찍어 바르고 얼굴 한번 못 본 신랑한테 시집이라고 왔더니라
길쌈도 못 배우고 말도 어눌하고 홀아부지와 살다가 시집이라고 왔는데
대추씨 같은 시엄시 땡감 같은 시누이 내 살아온 역사를 어예 말로 다하겠노


어머니 나이 팔십, 지금도 그 주소를 외우며
밤새워 술술 몸속에서 거미줄을 뽑아 달빛 아래 철커덕 철커덕 은빛 베를 짠다.


아이지깽 도요하시시 하시라죠 도고 산주 이찌노 니반찌





# 손수진 시인은 1963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2005년 <시와사람>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붉은 여우>, <방울뱀이 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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