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일기 - 백인덕
- 이 하늘 아래선 서러운 것도 죄가 된다
꾹꾹 눌러 쓴 엽서 한 통을 받아 쥔
오후, 예고없는 소나기.
쩔쩔 매는 사철나무 다 자란 잎 사이
푸르게 금 간 그대 얼굴도 보인다.
그것은 웃음, 울음이었던가?
캄캄해지는 하늘, 그 날의 눈을 들면
추억의 나선은하가 반짝이고
그 많은 별들의 감옥 가장 깊숙이
맴도는 어둠 하나가 밀려든다.
비로소 이 세상의 겉과 속을 뒤집으리라,
아, 너에게서 나에게로 기울리라.
최후의 僞惡(위악)의 가을이 지나간다.
*백인덕 시집, 끝을 찾아서, 하늘연못
오래된 약 - 백인덕
비 오다 잠깐 깬 틈
책장 사이 수북한 먼지를 털자
어디다 쓰는지 알 수 없는
알약 몇 개 떨어진다
언제,
어디가 아팠던가? 무심한
손길이 쓰레기통 뚜껑을 열자
스멀대며 퍼지는 통증 한 줄기
약은 몸에 버려야 제 격,
마른 침으로 헌 약을 삼켜버린다
그 약에 맞춰 몹쓸 병이나 키우면
또 한 계절이 붉게 스러지리.
백인덕 시인은 1964년 서울 출생으로 한양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1991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계간 <리토피아> 편집위원과 한국시인협회 사무국 간사 등을 역임했고 시집으로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함에 대하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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