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세월의 몸 - 정일근

마루안 2015. 11. 2. 00:06



세월의 몸 - 정일근



할머니는 부러졌다 붙은 뼈의 통증으로
비가 올 것을 아셨다
살 속에 숨은, 볼 수도 없는 뼈의 미세한 떨림으로
하늘의 움직임을 주술사처럼 예언하셨다
어린 시절 나에게 할머니의 몸은 일기예보
운동회나 소풍 전날의 설레는 밤이면
할머니 곁에 누워 내일의 일기를 물었고
할머니의 예보는 단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 할머니 세상 떠나시고
떠나시며 그 몸 내게 물려주셨는지
이제는 내 몸이 하늘의 변화를 감지한다
지난밤은 맑은 가을 하늘에 별들도 초롱초롱 빛났지만
아프고 난 몸의 한 곳이 심하게 땀에 젖어
새벽밥 먹고 학교 가는 딸아이에게
내일은 우산을 준비해야겠구나, 낮게 중얼거렸는데
세상을 때리는 요란한 빗소리에
내가 놀라 새벽잠 깨었다
나와 함께 살아가지만 내가 다스릴 수 없는 몸이 있으니
아문 상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세월을
이제는 어찌할 수 없나보다
하늘 보이지 않는 저편에서 흐려지거나 비가 오려면
칼 간 자리 욱신거리고 이내 땀에 젖는 세월이
내 몸을 자리하는 것을 어찌할 수 없나보다



*시집,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시와시학사








가을 부근 - 정일근



여름내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 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쫓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쭈글쭈글해지는 노동력 - 조숙  (0) 2015.11.03
헛발 디딘 절망 - 이선이  (0) 2015.11.02
가로등이 켜질 때 - 윤의섭  (0) 2015.11.01
단풍 - 이선영  (0) 2015.10.31
그날의 배경 - 김경미  (0) 2015.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