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쭈글쭈글해지는 노동력 - 조숙

마루안 2015. 11. 3. 01:04



쭈글쭈글해지는 노동력 - 조숙



병뚜껑 삐뚤게 닫거나
단추 어긋나게 잠근 채 아침상 차리거나
다 큰 아들 씻고 있는 화장실 앞에서
구멍 뚫린 팬티 바람에 신문 읽고 있는
자꾸만 그렇게 하고 싶어지는
나를 보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러닝셔츠 바람에 일할 수 있는 밭도 없고
구부정한 자세로 엎어질 논도 없이
일찍 하얗게 센 머리
늘어지는 뱃살에
아이들이나 입을 빈티지 청바지 걸치고
젊은 척 벌어먹고 산다


머리털 기름기는 빠지고
뇌 속도 헐렁해져
자꾸만 느슨해지는데
대한민국 평균수명은
나이 먹은 것보다 빨리 늘어나
먹고 살날이 까마득하다


쭈글쭈글해지면 노동력은 팔리지 않는다



*조숙 시집, 금니, 연두출판사








그 남자의 현재 - 조숙



나는 그 남자의
현재를 보지 못한다


내 삶의 반 너머에 있는 과거


종로에서 붉은 먼지 사이로 끌려가던
핏발 선 눈이 먼저 오고
추운 거리를 걸을 때마다
바지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엉덩이가 떠오르고
다시 생각할 수 없냐던
하얀 와이셔츠 접혀진 소매가 보이고


이십 년도 더 전에
<봄날은 간다> 부르자 하고
이십 년도 더 전에
마시던 막걸리를 시키고
이십 년도 더 전에
분노로 이글거리던 절망의 눈빛만 읽을 뿐


이십 년 너머 함께 살아왔을 아내
그를 닮았을, 아들
남자가
계획하고 있는 미래는 모른다





*시인의 말


뭐든 늦게 시작했다. 시와 관련한 것은,
좋아해서 그렇다. 그 이유밖에 없다.


한동안 물에 빠져 있었다. 장자 때문인 것 같다. 또 한동안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말의 불일치성 때문이었다. 어떤 때는 사람에 빠져 있었다. 지금도 사람에 빠져 있긴 하다. 뭐든 열렬하다가 어느 순간 발을 빼고 있다.


나는 기우뚱,한 순간을 좋아한다. 무엇이 열리거나 바뀌는 기운처럼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기우뚱, 하는 것도 좋아한다. 이제껏 기우뚱거리기만 한 것도 같다. 이 첫 시집은 아무리 봐도 기우뚱하다. 늦도록 했으면서도 바로 세우지 못했으니, 뭐가 많이 없는 탓이다.


작년에 반세기 산 것을 자축했다. 성수대교, 삼품백화점, 물폭탄을 피해 용케도 살아 있다. 최루탄, 곤봉, 고문, 시위 현장에서도 잘 살아남았다. 내가 겪은 일들이 이제는 신화처럼 까마득하다. 그런 표정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