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단풍 - 이선영

마루안 2015. 10. 31. 00:31



단풍 - 이선영



나는 더 이상 푸르러지지 못하리라


내 몸 속에선 잎들이 와글와글 끓어오른다
남는 것은 갈수록 되레 진해지는 분노라서
짙어지는 상처라서
참지 못하겠다고 잎들이
내 살갗을 뚫고 숭숭 돋아나온다
불거진, 붉은
이파리들 잔뜩 내뱉은 이 나무가
안에서는 폐허를 만들고 있는 이 나무가
바로 단풍, 나무다


나의 말은 더이상 푸르르지 못하리라
내가 말을 꺼내면 나의 입속에선 붉은 입들이 튀어나오리라


해가 쌓여서 내 안엔 붉은 응어리가 졌다



*시집, 일찍 늙으매 꽃꿈, 창작과비평








화양연화 - 이선영



가장 불행한 얼굴로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이노라고
리첸 부인은 말한다


"정말 많이 보고 싶지만, 먼 후일을 기약하기로 해요"
편지를 써야만 했던 날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고


게임은 거의 끝나가는데
남은 판은 더욱 절박한


사십세


행복은
불행이라는 돌틈에 숨은 작은 샘구멍


불행은
행복의 부서지기 쉬운 살을 감싼 갑각


알겠구나,
평생이
이 뗄 수 없는 연인들과의
부질없는 삼각관계임을!


불행의 적요한 한낮을
화(花) - 아 - 양(樣) - 연(年) - ㄴ - 화(華) 라디오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올 때


불행은 자기가 빠져나갈 틈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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