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헛발 디딘 절망 - 이선이

마루안 2015. 11. 2. 03:21



헛발 디딘 절망 - 이선이



저 보도를 설렁거리는 너덜한 걸음처럼 내겐
풀어버린 보행의 질서가 아름다웠다
뒤엉킨 추억을 머금은 듯
가로수는 어둡고 칙칙해
먹장먼지가 휩싸인 곤혹을 읽고 서 있었다


나는 오래도록 섬세함이 지닌 피로를 앓고 있었다
기갈 심한 어둠 너머
바람 빠져버린 바퀴처럼 주름 많은 거리에 서면
내 그림자에 씌인 내 詩를 친구는 그냥 버리라 했다


단내나는 울음으로
헛발 디딘 절망에 채일 때마다
나는 상처 근처에서
다시 이를 악물어야 했다


맨몸으로 부르는 노래에는
언제나 단내가 난다며
내 속의
견딜 수 없는 열꽃들이
나를 피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모르는 사이 나는 나를 뚫고 있었다



*시집, 서서 우는 마음, 청년정신








뻐꾸기 시계 - 이선이



비디오를 끄고 오디오를 켜는 사이였을까, 아니면
시사주간지의 정치면을 사회면으로 넘기는 내 손끝의 신경이
파아랗게 떨고 있는 순간이었을까
내 시선을 포획하는 뻐꾸기는 어김없이 우는 것이다
나를 위해 울어주리라던 사랑은 가고
술취한 청춘의 맹세도 갔지만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홀로 깊은 숨을 고르는 밤이면
뻐꾸기는 어김없이 울어주는 것이다
수제품 뻐꾸기시계를 들고 나를 찾아온
내 육촌의 안면을 안다는 월부 책장사의 낡은 바짓가랭이처럼
남루한 촌수를 팔아야하는 그 곡절을 울어 줄
인연의 심산유곡이 어디 있을까마는
아웃에 사는 노파가 치매에 걸려 집을 나간 뒤에도
뻐꾸기는 어김없이 구슬픈 울음을 우는 것이다
시간의 전신주에 둥지를 틀고
빨래를 삶는 나와 전화를 받는 나와 신문을 뒤척이는
나는 기어이 못본 체하다
원고를 쓰는 나와 울분을 삼키는 나와
나를 이기지 못하는 나에 대하여
뻐꾸기는 먼 옛날로부터 와서는
불면의 정수리를 아프게 쪼아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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